[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19>스카치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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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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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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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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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첨탑 어딘가에는 저주에 걸린 공주가 갇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쇠를 긁는 괴성을 지르며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용이 날아와 성 꼭대기에 앉아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그곳은 영국의 에든버러. 조앤 롤링이 어떻게 해리포터를 쓰게 됐는지 에든버러 기차역에 내리면 절로 알게 된다. 에든버러 성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매일 보던 풍경을 그대로 소설 속에 옮겼을 테니까. 적갈색의 성, 곧추선 첨탑, 황량한 야산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나는 요리학교를 마치고 떠난 영국 여행의 첫 행선지인 에든버러 역에 내리자마자 결정했다. 뒷골목 펍에 앉아 위스키 한 잔을 앞에 두고 오후 한때를 보내기로. 하긴 그게 내가 세운 계획의 전부였다. 무거운 문을 밀고 펍에 들어와 사위를 둘러보니 도서관의 책장처럼 위태로울 정도로 높다란 벽장에 오래된 위스키들이 빽빽했다. 같은 위스키라도 숙성 정도와 연식이 다르고, 거기다 스페셜 에디션까지 있어 그 종류가 무한대다. 아무리 마셔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파라다이스인 거다. 주당에게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이 도시에서 위스키 무용담을 얘기하는 것까지는 좋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뭘 먹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 그게…”라며 어물쩍거리게 된다. 학벌 좋고 성격 무난하고 돈도 잘 버는데, 이마 벗어진 남자 소개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굶을 일은 없다. 안동에 가면 찜닭집, 목포에 가면 홍어집 있듯이 스코틀랜드에 가면 튀김집(chip shop)이 있기 때문이다. 에든버러는 항구 도시라 해산물이 넘쳐나고 근처 안개 낀 산자락에서 자라는 앵거스비프도 유명하다. 하지만 결국엔 “신선하면 뭐해, 어차피 튀겨 먹을 건데”라고 말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뭐든 튀긴다. 초코바인 마즈바 튀김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렇다 보니 스코틀랜드의 우중충한 공기에는 약간 맛이 간 기름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그중에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게 있다. 나라 이름을 딴 음식, 바로 스카치에그(scotch egg)다. 간단히 말하면 달걀튀김이다. 한국식 달걀튀김(부산에 판다)과 다른 점은 튀김옷과 달걀 사이에 고기를 한 겹 두른다는 것이다. 달걀을 반숙으로 삶은 후 겉에 돼지고기나 닭고기 저민 것을 한 겹 싸고 그 위에 밀가루, 달걀 물,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다. 태양의 에너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노른자와 탄력 있는 흰자, 고기를 더하고 튀김옷을 입혀 튀기면 맛이 없기도 힘들다. 반숙 노른자는 용암처럼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린다. 튀김옷은 바삭거리고 고기는 특유의 식감으로 먹는 이를 유혹한다. 나를 먹어달라고.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스카치에그를 나이프로 우아하게 반으로 잘라 포크로 신선한 마요네즈에 찍어 먹어도 좋고, 사내답게 손으로 쥐고 우적우적 씹어 먹어도 좋다. 태생이 소풍음식이기 때문에 구태여 고급스러운 매너를 갖출 필요가 없다.

에든버러에서 현지인처럼 펍 구석에 앉아 스카치에그를 씹어 먹노라니 어릴 때 다니던 목욕탕이 생각났다. 이상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목욕을 자주 갔고 목욕이 끝나면 천막 친 분식집에서 튀김을 먹었다. 어린 날 그때처럼 에든버러에는 늘 비가 내렸다. 그 도시의 오래되고 아늑한 향이 더 진하게 내 몸에 스몄다. 비가 와도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를 햇빛처럼 받으며 갈 길을 갔다. 나도 젖은 몸으로 오들오들 떨며 거무죽죽한 벽돌 건물 뒤편으로 돌아섰을 때 고소한 튀김 냄새가 ‘후욱’ 끼쳐 왔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왜 튀김에 환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비도 피할 겸 펍에 들러, 체온 내려가 기름기가 당긴 탓에 튀김을 시키고 몸도 덥힐 겸 위스키를 마셨을 것이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었을 것이다. 그날 나도 그들과 같이 취해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滿醉)’라고 했던 바이런의 글귀를 되뇌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3)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 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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