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18>크로크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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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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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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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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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 중용은 없다. 모든 것이 과잉이다. 남성 호르몬, 근무 시간, 욕설, 쓰레기, 엄청난 크기의 솥과 지옥이 연상되는 불꽃, 보통 사람이 보면 ‘억’ 소리가 날 만큼 들어가는 버터, 크림, 소금, 그리고 셰프의 땀. 이 다다익선의 미덕을 실천하는 요리 중 하나가 프랑스식 샌드위치 ‘크로크무슈’다.

자, 우선 식빵 두 장을 준비한다. 이왕 만드는 거 사치스럽게 버터가 듬뿍 들어간 브리오슈나 깊은 맛이 나는 천연 발효 빵을 쓰는 거다. 얄팍하지 않게 담대하게 빵을 써는 것도 잊지 말자. 마담도 아니고 마드무아젤도 아닌 ‘무슈(monsieur·므시외)’를 위한 요리니까.

빵이 준비됐으면 소스를 마련해야 한다. 프랑스 소스 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베샤멜(b´echamel) 소스를 쓴다. 베샤멜 소스는 버터에 밀가루를 볶아 루(roux)를 만들고 우유를 부어 끓인 ‘화이트’ 소스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치즈를 녹여 넣는다. 금세 희고 걸쭉하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길 것이다. 그 하얗고 걸쭉한 소스를 빵 두 쪽에 골고루 바른다. 아끼지 말고 팍팍, 너그럽고 관대하게. 이제 빵 두 쪽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는다. 꼬리꼬리하면서도 고소한 스위스 그뤼예르(Gruy‘ere) 치즈면 더 좋다. 겹쳐놓은 빵 위에 또다시 치즈를 얹는다. 속에 치즈와 햄, 베샤멜 소스가 들어 있는 상황에서, 밖에 다시 치즈를 올리자는 거다. 이걸 200도 정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고 10분 남짓 기다리면, 속에 든 치즈는 녹아 뜨겁게 흐르고 겉에 올린 치즈는 갈색 빛으로 보글보글 끓는다. 빵을 한입 베어 물면, 치즈와 햄, 버터가 듬뿍 들어간 화이트소스가 어우러져 저절로 “프랑스는 위대하군” 같은 소리가 나온다.

내가 크로크무슈를 배운 것은 ‘나는 틀릴 수 없다’는 신조로 살아가는 남자로부터였다. 깊이가 아득한 파란 눈에 곱슬거리는 금발을 한 그의 이름은 ‘애쉬’, ‘올해의 젊은 셰프’상을 탔을 정도로 유능했고, 남이 듣기 싫어하는 말만 골라 하는 특별한 재주도 있었다. 그는 헤드 셰프입네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자정까지, 주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간섭, 충고, 질책, 지랄을 했다. ‘과잉’의 아이콘이었다고나 할까.

늦은 밤, 한 손님을 위해 혼자 이 느끼하고 거대한 크로크무슈를 만드는데 애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손에 있던 빵을 뺏더니 “내가 하는 걸 봐” 하고는 나 대신 크로크무슈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도 할 줄 안다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본전도 못 찾을 거 같아 참았다. 그는 헤드 셰프니까.

애쉬가 만든 크로크무슈는 내 것보다 빵도 두껍고, 치즈도 한 장이 아니라 두 장, 햄도 두 장이었다. 베샤멜 소스는 화장 처음 하는 여고생처럼 어찌나 덕지덕지 발랐는지 빵 사이로 줄줄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거꾸로 만들어도 맛있겠네라고 생각하는데 애쉬는 크로크무슈를 하나 더 만들고 있었다. 주문은 분명히 하나였다.

“이건 뭐야? 주문 더 들어왔어?”

“아니, 이건 내 거야. 어렸을 때 밤이면 엄마 몰래 냉장고에서 꺼내 먹던 게 있었어. 이거였어. 치즈와 햄.”

애쉬는 크로크무슈를 우적우적 씹었다. 치즈 반, 햄 반에 가까운 크로크무슈. 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는 게 아니라 햄과 치즈에 빵을 얹어 먹는 애쉬의 표정을 보니 문득 그이도 평범한 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 다음이었다. 마지막 주문을 쳐내고 주방 청소를 시작했다. 쓰레기통이 꽉 차 새 쓰레기통을 가져오려고 주방 밖으로 나왔다. 어두침침한 복도 저 앞으로 뛰고 있는 애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쯤이면 누구나 지쳐서 슬렁슬렁 걸어 다녔는데,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헤드 셰프였는데도 쓰레기통을 가져오려고 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를 남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누가 보지 않아도 땀을 흘리는, 그의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는 것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3)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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