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16>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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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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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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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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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을 샴페인이랑 먹으면 어떨까? 레이먼드 카버란 소설가 알지? 그 사람 단편소설 중에 ‘조심(Careful)’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아침으로 도넛이랑 샴페인을 먹는 사람이 나오더라고.”

“야야, 그건 캐비아를 밥에 올려 버터랑 간장에 비벼 먹는 거랑 같은 거지.”

4차원 친구의 엉뚱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말이야 당나귀야 싶었다. 도넛에 샴페인을 마신다고 해서 국가 기강이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그 도전정신이 낯설면서도 혹했다.

도넛은 늘 배고픈 중고교생 시절 학교 앞 분식집에서 사 먹던 간식거리였다. 언제 교체했는지 알고 싶지 않던 시커먼 기름에서 건져낸 도넛을 씹을 때면 찔꺽찔꺽 기름이 묻어났다. 하기야 밀가루를 튀기든 흙을 튀기든 가리지 않을 나이였으니까, 그것도 없어 못 먹었다. 한편으론 그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진짜 맛있었던 것일까?’ 회의가 일긴 하지만 도넛은 예외다. 속에는 잼을 넣고 겉에는 설탕을 묻혀낸 도넛에 하얀 우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이었을까? 업장에서 선배 셰프가 도넛을 디저트로 낸 적이 있다.

“도넛을?”

“응, 헤드 셰프가 디저트로 도넛을 낼 거라고 하더라고.”

얼떨결에 도넛을 만들어야 했던 콘은 그리스인 셰프였다. 마흔 줄이 넘은 그는 제빵·제과 경력만 20년이 넘었다. 제과·제빵 쪽으로는 못 하는 게 없고 묻는 즉시 백과사전처럼 척척 해답을 내놓았다. 그가 늘 들고 다니던 큰 공책에는 손으로 꼼꼼히 적은 레시피들이 사전처럼 A, B, C별로 적혀 있었다. D에는 당연히 도넛 레시피가 있었다.

도넛도 빵이다. 여느 빵과 다른 점이라면 오븐에서 굽지 않고 튀긴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질감을 살리기 위해 물 대신 달걀과 우유를 쓰고 단맛을 내기 위해 설탕을 많이 쓴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 도넛을 만들 때는 먼저 설탕과 이스트, 버터를 따뜻한 우유에 녹이고 달걀, 밀가루와 함께 섞어준다. 우유가 뜨거우면 이스트가 죽어버리니 조심해야 한다.

재료를 잘 섞고 나면 반죽을 한다. 밀가루 반죽이 묻어나지 않고 깨끗하게 떨어져 나올 때까지, 탄력 있고 매끄러워질 때까지, 손빨래하듯이 치댄다. 쌀밥 먹은 돌쇠처럼 은근과 끈기로 반죽을 치대다 보면 때가 온다. 이 반죽이 두 배로 부풀면 동그랗게 성형을 하고 2차 발효를 한다.

그러고는 170도로 예열해 놓은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는다. 튀기는 데는 5분이 채 안 걸린다. 다 튀긴 도넛은 너도 알고 나도 알듯이 뜨거울 때 설탕을 입힌다. 그 작업을 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코를 킁킁거리며 주방 사람들 시선은 도넛에 꽂혀 있었다. 설마 다 팔리진 않겠지, 저건 모양이 별로 안 예쁘니까 안 내놓겠지 등등 그들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짤 주머니로 초콜릿 크림, 커스터드 크림, 산딸기 잼을 앙증맞은 도넛의 배가 터질 만큼 꾹꾹 집어넣으면 완성이다.

기름에서 갓 건져낸 튀김이 맛있듯이 갓 튀긴 도넛이 맛있는 것은 당연지사. 갓 딴 사과를 베어 문 것처럼 신선했다. 향긋한 계피와 레몬향이 코에, 달달한 설탕이 혀에 닿고, 보드랍고 촉촉한 속살을 지나, 안에 든 초콜릿과 크림이 입안에서 터져 나오자 우리는 어린이처럼 좋아했다. 콘은 아버지처럼 근엄하고도 경박스럽게 “으하하”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도넛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어린애고, 어른이고 모두 한마음이었다. 음식은 과거로의 여행이란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들이 우리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먹던 음식을 지향한다. 다 커서도 어머니가 해준 집밥을 그리워하고, 세계적인 일류 셰프들이 할머니 적 레시피를 발굴하는 것도 그 이유다.

그나저나 샴페인에 도넛을 먹으면 어떨까? 뭐 그리 내키는 조합은 아니다. 샴페인을 따라 주는 미녀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아침, 침대에서. 어흥.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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