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누가 밤하늘에 달떡을 심어놓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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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흐뭇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논두렁의 생풀 냄새가 싱그럽다. 발아래 차르르! 차르르! 차이는 이슬방울들. 걸음마다 달빛싸라기가 우수수 부서져 발목까지 시리다. 도대체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함민복 시인). 훌쩍 한 걸음 다가온 앞산. 시냇물에 담뿍 담긴 하늘. 산은 웅숭깊고, 강물은 그윽하다.

추석이 코앞이다. 달덩이가 나날이 토실토실해진다. 음력 팔월 열나흘 달밤에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송편 빚던 일이 아련하다. 갈퀴손에 등 굽은 아버지, 검불 같은 몸피의 쪼글쪼글 어머니, 서울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자식들, 그리고 마당에서 누렁이와 깔깔대며 철없이 뛰어노는 손자들.

‘추석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저 달빛엔 꽃가지가 휘이겠구나!”/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서정주 ‘추석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햐아, 달빛에 꽃가지가 휘어지다니! 마당귀 족두리꽃이 허리를 잡고 웃는다. 식구들도 왁자지껄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각자 겪어온 세월만큼이나 송편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아버지 어머니 송편은 정갈하고 마침맞다. 큰아들 송편은 왠지 가늣하다. 그의 머리엔 어느새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장사하는 둘째아들 송편은 크고 투박하다. 얼굴에 제법 사업가 티가 배었다. 만삭의 막내딸 송편은 앙증맞다. 어쩜, 예쁘고 깜찍한 외손녀가 태어나려는가. 그래도 막내딸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였다. 험한 세상, 다들 사느라고 애썼구나!

송편은 달떡이다. ‘하늘의 열매’다. 흰 쌀가루로 하얀 달을 빚는다. 과일은 ‘땅의 열매’요, 토란은 ‘땅속의 열매’다. 각각 추석 차례상에 한자리씩 차지한다. 송편은 그해 맨 처음 나온 햅쌀로 빚는 게 원칙이다. ‘오려(올벼) 송편’이다. 솔잎을 켜켜로 깔고 찐다. 솔잎향이 새록새록 은은하다. 골무송편이란 것도 있다. 송편 위에 얹는 골무만 한 웃기송편을 말한다.

서울 송편은 한입에 쏙 들어간다. 어딘가 얄밉고 깍쟁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작고 예쁘다. 쑥, 송기, 오미자, 치자로 물을 들여 알록달록하다. 눈으로도 맛있다. 강원도 송편은 소박하다. 속이 반쯤 보이는 쫄깃쫄깃 감자송편, 덤덤한 도토리송편, 무생채를 소로 넣은 무송편 등이 그렇다.

충청도는 호박송편이 이름났다. 수저로 국화잎 모양을 내서 빚는 국화송편도 있다. 전라도는 모시잎송편과 꽃송편이 화사하다. 삘기송편은 차지고 졸깃한 맛이 으뜸이다. 경상도는 큼직한 칡송편이 대표적이다.

황해도는 송편에 손자국을 낸다. 크기도 서울 송편의 3∼4배나 된다. 함경도는 언감자송편, 평안도는 간장으로 간을 하는 조개송편, 제주도는 비행접시처럼 둥글납작한 완두콩송편이 독특하다.

송편은 손으로 예쁘게 ‘빚는 떡’이다. 시루떡은 증기로 ‘찌는 떡’이다. 인절미는 절구나 안반에 ‘치는 떡’이다. 치고 찧은 떡이라 제사상에 오를 수 없다. 그래도 맛있다. 오죽하면 인절미는 ‘서로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引), 잘라먹는(切), 떡(米)’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부꾸미나 메밀전병은 기름에 ‘지지는 떡’이다.

떡은 담장을 넘어도 밥은 못 넘는다. 이웃과 나눠야 떡이다. 이사 떡을 돌리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떡은 접착제처럼 찰떡궁합을 뜻한다. 제사떡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끈끈하게 이어준다. 밥과 술만으로는 접착력이 부족한 것이다.

추석날 아침,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둥근 두레밥상. 지난밤 빚었던 송편을 나눠 먹으며 웃음꽃이 다발로 피어난다. 척 보면 누가 빚은 송편인지 금세 안다. 무시로 킥킥대고 박장대소하며 밥을 먹는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가 빚은 송편을 한입 베어 문다. 목젖이 뜨뜻해진다. 하지만 어머니 송편은 그저 하릴없이 눈길만 준다. 차마 목이 메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그렇다. 추석 고향에 갔더란다. 밤새 그늘만 밟으며 도둑처럼 갔더란다. 마을 어귀 늙은 팽나무 여전하고, 산허리 하얀 메밀꽃 우우우 아기 젖니처럼 돋는구나. 딸랑딸랑 외양간 암소 워낭소리 정겹고, 가부좌 틀고 앉은 누런 호박보살 반갑구나.

달은 어쩌자고 그리 밝은지. 도대체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놓았을까’(송찬호 시인). 도대체 누가 밤하늘에 만삭의 달떡을 심어놓았을까. 도대체 누가 그 하얀 볼에 검댕을 묻혔을까.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추석#송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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