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의 사회탐구]정유라, 민주공화국의 공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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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졸업취소가 가능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정유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의 졸업취소 결정보다 교육부의 이화여대 입학취소 요구가 먼저 나왔다. 고교 졸업과 상관없이 이화여대가 입시과정과 학사관리 전반에서 정유라에게 부당한 특혜를 줬다는 의미다. 정유라가 치르지도 않은 시험에서 답안지까지 나왔다니 숨은 조력자가 제법 많다는 뜻이다.

덜떨어진 소녀에게 남용된 권력

 고교생들은 정유라의 고교 장기결석보다는 참여하지도 않은 국어 수업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데 분노했다. 그의 국어 실력은 이화여대에 제출한 리포트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잘 드러난다.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에 파김치가 된 몸을 일으켜 수행평가를 한 학생들은 시쳇말로 꼭지가 돈다.

 과거 정권에도 국기를 흔든 권력형 비리가 수차례 있었다.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이권에 개입하고 권부에 자기 사람을 밀어 넣고 기업들의 팔목을 비틀어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북지원이라든가, 장학사업이라든가, 청년일자리라든가, 그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다. 덜떨어진 한 소녀의 성취를 위해 규칙이 바뀌고 대통령 권력이 생짜로 남용된 적은 없었다. 정유라는 특권과 특혜로 장식된 레드카펫을 걸어간 현대판 공주였다.

 승마는 ‘마칠기삼’(말 70%, 기술 30%), 마장은 ‘마팔기이’(말 80%, 기술 20%)라고 한다. 승마가 귀족스포츠로 불리는 이유다. 과거 영국 앤 공주가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었고 푸미폰 전 태국 국왕의 손녀인 시리완나와리 나리랏 공주도 정유라가 출전한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다. 부모가 대통령 측근이고 귀족스포츠를 하는 정유라가 스스로를 공주라고 인식해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승마대회에서 정유라에게 낮은 점수를 줬던 심판이 조사를 받고 승마협회 비리를 캐던 경찰이 쫓겨나고 문화체육관광부 국장들이 물러났다. 자신의 성취가 숱한 사람들의 눈물과 희생 위에 이뤄졌다는 걸 ‘공주님’은 알고 있었을까. 국정 농단 양상이 뜨거운 교육열과 맹목적 모정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최순실 게이트’의 희극적 요소다.

 전대미문의 국정 농단에도 불구하고 100만 촛불집회가 질서 있게 끝나고 나라가 유지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의 힘이다. 지금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어도 자식만은 배움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대한민국을 만든 동력이자 사회통합의 근간이다. 이런 믿음과 기대를 최순실 모녀는 시원하게 걷어차 버렸다. 이 분노와 절망감이 수능을 마친 수험생까지 오늘 밤 촛불을 들게 하는 것이다.

수능 마친 수험생 촛불 드나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시대마다 달라도 교육의 핵심은 절제(discipline)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달리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분별을 익혀야 한다. 탐욕스러운 엄마 밑에서 원하는 건 뭐든 가졌던 정유라가 절제를 배웠을 리 없다. 못된 망아지 엉덩이에 뿔나듯 정유라는 제멋대로 커 버렸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 누굴 원망하랴.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조희연#서울시교육감#정유라#이화여대 입학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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