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때가 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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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심상치 않은 책제목을 보았다. ‘노후파산’이다. 한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제목만으로도 널리 회자되었는데 ‘노후파산’이란 제목 역시 관심을 끈다. 파산이 노후라는 힘없는 단어와 만나니 더욱 파괴적으로 느껴진다. 아무리 아파도 청춘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위로가 되지만 파산한 노후는 말만으로도 아프다.

노후에 대해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한 분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충무로에 상업사진 스튜디오를 낸 김한용 선생이다. 195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그분에게 사진을 찍히지 않은 톱스타가 없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그분도 초창기에는 가난해서 충무로 스튜디오에서 마포에 있는 집까지 걸어서 출퇴근하고 점심을 거르기도 했다고 말한다.

“버스비가 없을 때는 ‘얍! 드디어 걸어야 할 때가 왔다!’, 점심 값이 없으면 ‘얍! 드디어 점심을 굶을 때가 왔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씩씩하게 걸어 다니고 굶고 그랬어요. 어허허허.”

마치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듯 그렇게 기합을 넣으며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충무로의 명물로 꼽혔던 그분의 힘찬 기합소리와 웃음소리는 구십의 연세에도 여전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시절 충무로의 스튜디오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수년 전, 오랜 세월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좀처럼 지갑을 여는 일이 없던 그분이 폭탄선언을 했다.

“팔십이 넘으면서 결심했어요. 앞으로 내가 점심을 사면 몇 번이나 살 기회가 있겠어요. 이제부턴 내가 점심 값을 내기로 했소. 야압! 어허허허.”

그날 한바탕 웃음으로 우리 모두 기분이 좋았다. 80년 몸에 밴 습관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연세에 획기적인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유연함이 놀랍고 유쾌했다. 그 이후로도 두어 번 더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뵐 때마다 기합소리의 음량은 줄고 있었지만 대신 마음의 여유가 커지는 모습이 ‘참 멋진 노후’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사실 “때가 왔다”는 것은 곧 “때가 갈 것이다”라는 말과 통한다.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담대하고 의연하게 견디면 결국 그 시간은 흘러가고 더 강하게 단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픈 청춘이든 파산한 노후든 새봄에 어울리는 기합 한 번 넣어보면 어떨까. “이야아압! 희망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라고.

윤세영 수필가
#노후파산#노후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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