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가상현실과 유령집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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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기기를 착용한 청중 옆에서 걷고 있는 마크 저커버그.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VR 기기를 착용한 청중 옆에서 걷고 있는 마크 저커버그.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김호경 사회부 기자
김호경 사회부 기자
‘젠장(Damn), 괴기스럽네요(it‘s kind of creepy).’

22일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사진에 달린 댓글입니다. 당시 저커버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전시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그는 이날 삼성전자 신제품 공개 현장에 연사로 깜짝 등장한 직후 현장 사진 3장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 중 유독 한 사진에만 관심이 쏠렸습니다. 25일 낮 12시 현재 이 사진에 달린 댓글은 1만4626건. 나머지 사진 2장에 달린 댓글이 모두 합쳐도 400건이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화제의 사진 속 저커버그는 미소를 머금고 연단을 향해 청중 사이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들 삼성전자가 새로 공개한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상태였거든요.

이 사진을 본 해외 누리꾼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VR에 빠져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일도 몰랐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한 누리꾼은 VR에 빠진 청중을 ‘좀비’로 비유했습니다. ‘미래는 망했다(The future looks fucked up)’라는 댓글도 있었죠. 이처럼 VR시대가 암울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댓글은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사진을 보자마자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미국 마블코믹스의 ‘엑스맨’ 캐릭터 ‘사이클롭스’가 떠올라 우스꽝스럽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누리꾼들이 괜히 호들갑을 떤다고 여겼죠. 하지만 찬찬히 댓글을 읽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마침 제가 그 사진을 본 날은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령집회’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유령집회는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제한받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홀로그램 영상을 활용한 가상 집회입니다. 경찰이 유령집회에 대해 법률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나서자 누리꾼들은 “경찰도 홀로그램 물대포 쏘고 홀로그램으로 강경 진압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비꼬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이제 집회는 홀로그램으로 하면 되겠네”라며 유령집회를 적극 활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유령집회를 새로운 평화 집회 유형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칼럼도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이런 평가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앰네스티 관계자는 “오히려 유령집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우려한 반응이었다”며 “유령집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커버그가 올린 사진 한 장과 유령집회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최근 각광받는 VR와 홀로그램 영상은 분명 다른 기술이고요. 하지만 그런 시대를 그려 보기에는 꽤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고민하다 문득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본 영화 ‘데몰리션 맨’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속 배경은 2032년, 남녀 주인공이 VR 기기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저와 제 친구들은 매우 허탈해했죠.

20여 년 전 영화 속 장면은 이미 현실이 됐습니다. VR를 활용한 성인 콘텐츠가 이미 시판 중이거든요. 한 페이스북 지인은 VR를 컬러 모니터에 비유했습니다. 컬러 시대에서 흑백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VR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라는 얘기입니다.

다만 VR시대가 디스토피아일지 풍요로운 신세계일지는 결국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VR로 즐기는 영화나 게임은 무척 기대되지만 VR에서 사랑을 나누거나 집회나 시위를 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괴기스럽네요.

김호경 사회부 기자 whalefish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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