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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SNS에서는]‘대나무숲’에서 외쳐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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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SNS에서는]‘대나무숲’에서 외쳐보세요

김수연 정책사회부 기자 입력 2015-10-02 03:00수정 2015-10-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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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일본군 성노예를 언급하시면서 그것은 강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자원봉사활동의 현장이랍니다. 저는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들으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습니다. 왜 이러한 사상을 가진 교수가 민족 고대에서 교편을 잡고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고려대 대나무숲’. 지난해 11월 한 학생이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 익명의 제보를 보고 해당 교수에게 수업을 들었던 다른 학생들도 ‘나도 같은 경험이 있다’며 힘을 실어줬다. 댓글이 줄을 이었다. 해당 교수에 대한 비난 여론이 학내에 일었다. 교수의 ‘말실수’는 학생들 사이에 확산됐고, 급기야 지난달 22일 이 학교 정경대학 학생들은 교수의 해임과 재발 방지 약속을 학교 측에 요구했다.

분노는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려대 대나무숲’(사진)에 올라온 글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퍼졌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역사적 인식을 안고 있던 많은 이들이 분노를 표했다. 해당 교수의 이름을 네이버에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위안부’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다.


학교가 진상조사에 나서자 해당 교수는 “위안부를 모독한 발언을 한 일이 없고 당시 사회를 분석했을 뿐이다. 우리나라가 일본 문제와 관련해 지나치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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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지난달 경기 광주시에 있는 ‘나눔의 집’에 가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를 직접 둘러봤다.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자매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분들은 각방을 쓰며 서로 교류를 잘 하지 않는다. 같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끼리도 정을 나누지 못할 만큼 경계심이 강한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강일출 할머니(87)는 이야기 도중 찢긴 흔적이 남은 뒤통수를 내보이며 “조금만 벗어나도 붙잡아 군홧발로 머리를 걷어차는 일본군이 무서워 나중엔 도망가길 포기했다”며 “지금까지 가족들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치욕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교수의 주장처럼 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에 나선 여성들이라면 왜 탈출을 꿈꾸다가 군인에게 짓밟히고, 트라우마로 인해 작은 방에 자신을 가두며 살게 됐을까.

다행인 것은 이처럼 위안부의 역사에 대해 왜곡된 발언을 일삼는 일부 교수의 행동이 SNS에 개설된 ‘○○대 대나무숲’을 통해 제보되는 일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대나무숲은 임금의 귀가 당나귀 모양으로 변한 사실을 어디서도 말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던 신하가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서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는 전래동화에서 따온 말이다.

페이스북에서 ‘대나무숲’을 검색하면 전국 각지 대학의 총학생회가 운영하는 ‘○○대 대나무숲’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말 못할 가정사의 아픔, 연애의 고통, 학업의 어려움, 교수의 행동이나 언행에 대한 평가를 쏟아낸다. 이들의 모든 외침이 학교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공론화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학교도 문제가 심각하다 판단하면 진상조사에 나서거나 그에 따라 징계위원회를 열기도 한다. 논란이 됐던 고려대 교수는 진상조사를 받고 있다.

얼마 전엔 전직 대통령의 딸인 교수가 ‘○○대 대나무숲’에 올라온 제보로 수업에서 교체된 일도 있었다. 이 교수가 교양영어 수업에서 학생들이 예습을 제대로 해오지 않는다며 정원 40명 중 절반인 20명을 결석처리하고 내쫓았다는 제보가 올라온 것. 학생에게 예습을 요구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당연할 수 있지만, 과제도 아닌 자율적인 예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은 과하다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학교 측은 사실 확인을 했고, 학생들의 민원 사항을 파악해 담당 교수를 교체했다.

그동안 일부 교수는 학생의 학점을 무기로, 또는 ‘학문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강단에서 막말을 해 왔다. 하지만 마땅한 제재 수단은 없었다. 이런 교수들에게 ‘대나무숲’이 강력한 감시도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교수를 교체하기도 한다. 익명의 작은 외침이 큰 울림을 만든 것이다. 작지만, 큰 변화가 아닌가.

김수연 정책사회부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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