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고개 숙인 회장님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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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고객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있는 황창규 KT 회장(왼쪽).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7일 고객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있는 황창규 KT 회장(왼쪽).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요즘 기업의 홍보 담당자들이 공통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달 일어났던 마우나오션리조트 사고 당시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처신에 대한 겁니다.

사고 당시 이 회장의 대처는 빨랐습니다. 그는 사고 다음 날인 18일 오전 6시에 바로 사고 현장을 찾고 “고귀한 생명을 잃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엎드려 사죄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오후에는 임시 빈소가 마련된 병원을 찾아 조문을 했습니다. 사고의 잘잘못을 떠나 리조트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제스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주요 포털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일단 누리꾼들은 싸늘했습니다. ‘이미 사고가 난 판국에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같은 댓글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반응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나마 책임자가 개념이 탑재(상식이 있다는 뜻)돼 있어 다행이다’ ‘건물을 부실하게 지은 사람들이 잘못이지, 회장도 참 안타깝다’는 식의 이 회장을 동정하는 글까지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업계 관계자들은 그 뒤로 “회장이 직접 나섰기 때문에 그나마 비난 여론이 잦아들었다”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신속한 사과’는 기존 관행으로 보면 낯선 일입니다.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시시비비가 드러나기 전에 기업의 대표자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업에서는 “부정적 이슈가 등장할수록 ‘회장님’이 얼굴을 드러내는 건 금물”이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변화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일단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소식이 알려지고, 사람들의 비판과 지탄의 반응이 격해지기까지 며칠씩 걸리던 과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해당 회사에 대한 SNS 비난 여론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5월 있었던 남양유업 막말 파문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남양유업은 당시 ‘막말 통화’ 내용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 뒤 며칠이 지나서야 사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악화된 여론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요즘 홍보·마케팅업계에서는 “숨어 있느니 빨리 나와서 잘못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면서 “SNS 시대의 새로운 리스크 관리 기법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걱정도 됩니다. 이들의 사과가 진정한 반성이 아니라 사건 무마용으로 변질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불같이 타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SNS 여론의 약점을 노린 표면적인 사과라면, 아무리 그것이 발 빠른 대응이라 하더라도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이 회장의 사과문 발표 사진에는 이런 댓글이 있었습니다. ‘얼굴 표정을 보니 의연한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얼마 전 또 한 명의 ‘회장님’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국민 1200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시킨 사건이 들통난 지 하루 만이었습니다. 공식 선임된 지 이제 한 달 반이 지난 KT의 황창규 회장은 사과문을 읽기 전 허리를 두 번이나 굽혔습니다.

이번에도 누리꾼들의 반응은 엇갈립니다. ‘대형 사건이 터져도 꾸벅 사과만 하고 그만’이라는 비난과 ‘사고는 앞의 사람들이 쳤는데 신임 회장이 덤터기를 썼다’는 옹호가 동시에 나옵니다. SNS에서는 ‘개인정보도 롱텀에볼루션(LTE)의 속도로 털린다’는 비아냥이 섞인 글이 나돕니다. 사과의 본질은 시간이 아니라 ‘진심’ 아닐까요. 사과만 ‘LTE급’으로 변한다고 실망한 국민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계시겠죠?

권기범 소비자경제부 기자 ka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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