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의 ‘100세 시대’]할머니는 ‘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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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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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집에서 애 보는 일, 감옥살이가 따로 없죠.”

할머니들의 고민이 깊다. 두 살배기 외손자를 돌봐주고 있는 59세의 ‘젊은’ 할머니 C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원래 C 씨는 손자를 맡아 키울 생각이 없었다. 친한 친구가 손녀를 돌보며 몸고생, 마음고생 하다가 결국 위암 수술까지 받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집을 사주지 못해 며느리 볼 면목이 없는데 애라도 봐줘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손녀 봐주기를 자청한 친구였다. 그랬던 친구가 울면서 하소연했다. 허리가 아파서 끙끙대는 모습을 보던 며느리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 요즘 예순은 예전 같으면 40대래요. ‘피곤하다’ ‘아프다’는 말 자꾸 하지 마세요. 정신력으로 버티셔야죠.”

하기야 다른 며느리 중에도 “요즘 할머니들의 정신력이 예전 할머니들만 못하다”고 불평한다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런데 어찌 하다 보니 “손자 봐주지 말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 누가 애 보고 있느냐”며 큰소리치던 C 씨 자신도 친구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힘들게 직장을 잡은 딸이 “제발 살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것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딸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손자 돌보는 일을 시작한 C 씨는 요즘 하루에도 열두 번씩 후회를 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고 할까. 분명 마음으로는 딸을 도와주고 싶고 손자가 사랑스럽지만 도대체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온몸 마디마디가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다. 몸이 자꾸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다. 딸과 사위의 퇴근 시간은 갈수록 늦어지고, 남편은 “그렇게 몸이 아프면 당장 그만두라”며 화만 낼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년만 해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는데 요즘엔 외출을 거의 못한다. 날씨 좋은 날,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 같은 데 가서 혼자 앉아 있으면 ‘새장에 갇힌 새’ 같은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워 눈물이 날 정도다.

걱정거리는 이 외에도 많다. 두 살밖에 안 된 손자에게 조기교육을 한다고 나대는 딸과의 갈등도 문제다. 무엇보다, 아들과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가장 큰 고민이다. 아들이 “누나가 엄마 고생시키니까 앞으론 부모님 다 책임져”라고 말할 때마다 C 씨는 손자 봐주는 문제로 부모 자식 간, 형제간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앞으로 다른 손자가 태어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만 6세 이하 아동의 40.7%, 특히 0∼2세 영유아의 58.1%를 돌보는 사람이 조부모라고 한다. 부모 퇴근시간을 배려해주는 맞춤형 보육시설이 부족한 데다 아직도 남보다는 가족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보니 조부모, 특히 할머니에게 가해지는 자녀들의 압력이 거센 것이다. 아동 보육의 ‘사각지대’를 할머니들이 메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고달프다. 2012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손주를 양육하는 여성 노인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할머니의 손주 양육시간은 1주일에 47.2시간으로, 하루 9시간 정도의 중노동인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할머니들이 자식들로부터 받는 용돈은 한 달 평균 37만 원에 불과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할머니들은 ‘자녀에게 도움이 되어 보람 있다’(84.7%), ‘손주가 커가는 모습에 생활의 즐거움이 늘었다’(83%) 등 양육에 긍정적인 태도도 보였지만 동시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만두겠다’(67.3%)는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가장 힘든 건 역시 ‘몸’의 문제였다. 63.7%가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응답한 것이다. 손주 돌보는 일 자체도 힘들지만 아이를 돌보는 동안 ‘살림’까지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노동을 견뎌야 하고 결국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이다.

사실 건강은 노년의 삶의 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삶의 질에 대한 거의 모든 연구에서 ‘여자 노인의 삶의 질이 남자 노인에 비해 훨씬 낮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들 여자 어르신들이 남자 어르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며 그래서 여자가 남자들에 비해 더 오래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삶의 질’ 면에서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취약하다.

그 이유는 바로 신경통과 관절염, 골다공증처럼 생명을 직접 위협하지는 않지만 생활을 힘들게 하는 질병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6, 7년 정도 평균수명이 길지만 아픈 다리나 허리를 안고 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삶의 질도 낮아지는 것이다. 특히 손주를 봐주기 시작하는 50, 60대는 70대 이후의 건강을 확보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비공식적인 손주 돌봄 노동은 사회적으로도 저평가되고 있다.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은 어느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숨어 있는’ 노동력일 뿐이다. 보육 관련 정부의 예산은 크게 늘고 있지만 손주를 양육하는 할머니에 대한 지원은 아직 없는 상태다. 이건 ‘나이 든’ 양육자에 대한 ‘연령 차별’일까. 아니면 ‘여자니까’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 차별’일까. 여자의 일생, 정말 녹록지 않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할머니#외손자#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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