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대통령 병에 걸린 시장, 도지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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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한국에는 ‘대권 병(大權 病)’ 또는 ‘대통령 병’이란 말이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쉬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시절 여권으로부터 늘 듣던 비난이 ‘대통령 병 환자’였다. 일종의 정치 견제요 탄압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정치인의 당연한 욕심이자 목표이다. 그러나 파란만장으로 굴곡진 한국의 정치역사 속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려는 열망은 병(病)으로까지 매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도 아프리카 우간다는 대통령에 출마하려는 유력 정치인들을 법으로 옭아매어 주저앉힌다. 그래서 국민들 사이에는 대통령에 대한 열망이 왜 범죄이며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냐는 한탄의 소리가 높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우간다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 자리를 탐내는 정치인을 혐오하는 정서는 여전히 강하다. 두 김씨 이후의 대통령이나 유력 후보치고 대통령 병에 걸렸다는 욕을 듣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다. 정치가 그만큼 싫고 미운 존재인 탓이다.

● 파리 여성시장, 철저한 지역행정가 행보

선진국에서는 정치인의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병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을 꿈꾸는 의원이나 시장, 주지사들은 무척 신중하다. 의원보다 시장이나 주지사가 더 조심한다. 미래의 승부를 위한 고도의 정치 전략일 수 있다. 위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인 이전에 행정가이다. 그들의 최우선 책무는 중앙 정치가 아니라 지역주민을 위한 행정이기 때문에 정치적 언사를 극도로 아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땅 고르기 작업이라는 구설을 탈 만한 정치적 행동을 피한다.

프랑스 파리 시장은 많은 정치인들이 갈망하는 자리. 대통령으로 가는 구름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올 3월 최초의 여성 시장이 탄생했다. 안 이달고 파리 부시장이 큰 표 차로 시장이 된 것. 그는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양재사의 딸로 자랐으나 “나는 선출직 공무원이지 모델이 아니다. 화려한 옷 대신 차분한 옷을 입겠다”는 수더분한 말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달고로서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첫 여성 대통령을 노릴 만하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부터 당선 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가 ‘대통령 욕망’을 가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당선 기자회견에서 “세상에 희망차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파리의 얼굴을 보여주겠다”며 주택단지와 공원 등을 늘리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 美 공화당 희망 크리스티 “대권? NO”

미국에서도 주지사나 뉴욕 시장은 대권의 길목으로 불린다. 이들은 ‘실제 미국’에서 일을 해 대통령에 적합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여의도 정치를 벗어나 충분히 현장 행정을 경험했다는 뜻. 대통령 43명 가운데 20명이 주지사를 경험했다. 이러니 웬만한 주지사나 뉴욕 시장은 당선되자마자 대권 반열에 오른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2012년에 이어 2016 대선에서도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주 검찰총장 시절, 공직자 130명을 부패 혐의로 기소해 전원 유죄 판결을 받게 한 그는 2010년 1월 민주당의 오랜 아성인 뉴저지 지사가 되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끊임없이 대선 출마설에 휩싸였다. 그때마다 지체 없이 강하게 출마를 부인했다. 2010년 11월에는 “(내가 출마할) 확률은 제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대선에 안 나간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자살이라도 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끝까지 공언을 지켰다. 압도적으로 재선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당신들이 뉴저지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뉴저지에 매달릴 뿐”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에 이어 2010년 뉴욕 주지사가 된 앤드루 쿠오모는 민주당에서 줄기차게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 그 역시 대답은 언제나 “노”. 그는 대선 운동을 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대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주인 아이오와나 뉴햄프셔를 포함해 다른 주에는 여행조차 가지 않는다. 대선 출마 질문을 받는 것이 싫어 텔레비전 출연도 거의 마다한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도 결코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적 없이 12년 임기를 끝냈다.

● 한국, 당선되자마자 욕심 노골화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장이나 도지사들은 유권자들이 찍은 도장의 인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기 위한 예비 동작과 발언을 쏟아냈다. 당선 기자회견에서부터 대통령에 대한 욕심을 직간접으로 드러냈다. 재선된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대권 도전을 선언하겠다”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역시 재선의 홍준표 경남지사도 “6개월 더 지사직을 하는 것보다 대통령 되는 게 낫다”고 밝혔다. 김기현 울산시장 당선자는 “대통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여기에 남경필 경기지사 당선자는 연합정치를 말하며 부지사를 야당에 내주겠다고 했다.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도 야당과 당정 협의를 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당선되자마자 팽목항으로 차를 몰고 갔다. 이 모두 속이 보이는 정치적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의도야 훌륭하지만 시장이나 도지사가 당선되자마자 할 일은 지역의 현안을 걱정하고 챙기는 일이 아닌가. 이 모두 속 보이는 발언이요 행동이다. ‘대통령’이란 말만 안 꺼냈을 뿐 “내 욕심은 그것이오”를 넌지시 알리면서 인기를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의 결과이다.

벌써 이러니 “대통령 병에 걸린 시장, 도지사들 아니냐”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지역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언론이 불러주는 ‘잠룡’ 소리에 취해 지방행정가라는 본분을 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대중인기영합주의 행정을 할지 걱정이다. 아직 한국에는 대통령 병에 대한 혐오 정서가 짙다는 사실을 이들 모두 깨달을 필요가 있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대통령#정치#욕심#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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