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이별의 예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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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케이블채널 쇼타임의 드라마 ‘어페어’
지난달 시즌4를 시작한 미국 케이블 채널 쇼타임의 드라마 ‘어페어(Affair)’. 통속극이지만 많은 비평가와 시청자로부터 ‘고품격 막장’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점 찍고 변신하는 여주인공과 김치 싸대기는 없다. 말 그대로 한 유부남과 유부녀의 불륜을 따라간다.

드라마의 명성은 다중시점 플롯에 기인한다. 만남, 불륜, 결혼, 파국, 새로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두 주인공과 주변인에 의해 매번 달리 표현된다. 서로에 대한 남녀의 기억은 완벽히 엇갈린다. 마주친 장소, 걸친 옷, 먼저 유혹한 이, 사랑을 나누는 내밀한 순간에 속삭인 말, 관계가 어긋나는 이유까지.

극 중이라지만 배우자와 자식을 팽개치고 만난 사람들조차 이러니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겪는 기억의 자의적 왜곡과 소통 오류가 오죽할까. 둘러보면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작: 디지털뉴스팀 김희원 인턴
제작: 디지털뉴스팀 김희원 인턴
최근 인기 팟캐스트에 출연한 여성 연예인이 유명 축구선수인 전 애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놔 홍역을 치렀다. 해당 축구선수는 교제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다. 둘 사이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일생을 건 사랑이 상대방에겐 흔한 ‘썸’일 수 있다.

어찌 됐든 “지금 다른 이와 사귀고 있다”면서도 방송 출연 때마다 사골 우려먹듯 이를 거론하는 듯한 태도가 역풍을 불렀다. 누리꾼들이 ‘너무 과한 정보(TMI·Too Much Information)’라고 비판한 이유다. 연예인이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산다지만 이미 끝난 연애사를, 상대방 동의 없이 이렇게 속속들이 노출해도 되는 걸까.

이성 문제로 구설에 오른 몇몇 유명 정치인 사례도 마찬가지다. 권력형 범죄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더 오래 기억되는 건 막장드라마 대사 같은 서로의 주장뿐이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이 왜 ‘한밤중 부부 침실에 들어와 우리를 내려다봤다’ ‘아니다. 침실로 가는 계단에 쪼그리고 있었다’와 같은 공방을 실시간으로 접해야 하나.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상열지사의 당사자건 특정 목표와 이상을 위해 뭉쳤던 사이건 한때의 뜨거움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 열정이 클수록 이별의 고통도 크지만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상대를 비난하고 흠집 내 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요, 나의 진정성만 의심받는다.

4일 전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소설가 최인훈. 대표작 ‘광장’에서 “세상에 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라고 했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이별을 이 말에 대입해 본다. “사람은 한 번은 이별한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이별하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이별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가장 빛났던 순간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는 성숙한 이별을 보고 싶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어페어#이별#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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