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천국과 지옥엔 번지수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0일 0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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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유명 방송인 겸 셰프 앤서니 보데인 (출처: 위키피디아)
미 유명 방송인 겸 셰프 앤서니 보데인 (출처: 위키피디아)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만화가 이현세의 히트작 ‘남벌’에 나오는 문구다. 권력자와 유명인을 종종 접하는 직업을 가진 후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자살이나 불치병으로 잃은 고위 관료, 불임으로 부부관계 파탄 난 기업 임원, 끝없는 인정 투쟁에 찌든 유명 교수…. 처지와 상황은 달랐으나 누구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면서 당사자는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 같았다.

3일 간격으로 세상을 등진 미국 유명 디자이너 케이트 스페이드와 셰프 겸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을 보며 이 말을 되새겼다. 둘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고 그 성공 또한 현재진행형이었다. 명사 재산을 공개하는 온라인 매체 셀러브리티넷워스닷컴에 따르면 미주리주 시골 소녀에서 뉴욕의 패션 여왕으로 변신한 스페이드는 2억 달러(약 2230억 원), 미슐랭 별 2개 식당의 요리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방송 진행자를 종횡무진한 ‘셰프테이너의 원조’ 보데인은 1600만 달러(약 178억 원)의 재산을 지녔다. 부, 명성, 영향력을 다 갖춘 그들조차 자신만의 암흑에 갇혔다는 사실에 먹먹함을 느꼈다.

보데인의 쇼 ‘미지의 일부(Parts Unknown)’를 즐겨보는 기자에겐 특히 그의 자살이 ‘멘붕’으로 다가왔다. 이 프로그램은 위트 있고 신랄한 문체로 전업 글쟁이 뺨치는 실력을 보여준 보데인의 개성과 매력을 극대화했다. 그는 유명 식당과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이 즐겨 찾는 허름한 식당에서 그들의 삶을 살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식당에서 1992년 흑인 폭동의 상흔을 찾고, 독재자 카다피 사후 리비아 젊은이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이 쇼는 단순한 먹방과 음식 평론을 넘어선 한 편의 문화인류학 교과서였다.

보데인이 쓴 베스트셀러 표지들
보데인이 쓴 베스트셀러 표지들
2016년 5월 그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베트남 서민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는 모습이 세계적 화제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 미국 역사에 치욕을 안긴 과거의 적이 새로운 동맹이 됐음을 그 어떤 외교 문서보다 생생히 알려주는 이 장면을 두고 아무도 ‘이미지 정치’ ‘기획 연출’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보데인의 진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둘의 죽음 후 이유와 방식, 일반인에게 미칠 후폭풍에 대한 보도가 한창이다. 우울증에 관한 연구 결과, 유명인 자살을 다루는 미디어 행태에 대한 갑론을박도 뜨겁다. 어느 하나 뾰족한 것은 없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 자살자의 절반은 생전에 정신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0대 여학생의 자살을 소재로 지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13가지 이유’에 대한 연구도 비슷하다. 샌디에이고 주립대에 따르면 방영 후 미 검색 사이트에서는 자살 방법과 예방법에 대한 검색률이 모두 20%포인트 이상 늘었다.

이젠 ‘인명재천’ ‘안분지족’만 강조하기보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생명과 죽음 등 삶이 지닌 양면성부터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부러운 타인의 삶에 지옥이 있듯 보잘것없는 내 일상에도 숨은 천국이 있음을 깨달을 날이 올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려준 두 사람의 명복을 빈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케이트 스페이드#앤서니 보데인#미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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