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신광영]친고죄 폐지 3년 앞당길 수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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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기자
신광영 사회부 기자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조순형 의원이었다.

“이거 우리가 처리 못 하면 구설수에 오를 겁니다. 이거 폐지해야 됩니다.”

2010년 3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 적막감이 돌았다. 조 의원이 말한 ‘이거’는 형법의 성폭력 친고죄 규정이다. ‘피해자가 고소해야 처벌한다’는 바로 그 조항이다. “제발 없애 달라”는 여성단체 요구가 당시 절정이었다.

“학계 의견을 수렴해야 하지 않을까요.”(장윤석 법안소위 위원장)

“피해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의미에서 계속 있는 게 오히려….”(손범규 의원)

“고소 취하해 달라고 가해자들이 하도 괴롭혀서 피해자들 두 번 울어요.”(조 의원)

팽팽하던 토론은 8일 후인 그해 3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장 위원장이 “정리를 좀 하겠다”고 나서면서 ‘폐지’ 측이 밀리기 시작했다.

“성폭력특별법을 보면 성범죄는 경미한 경우 빼고는 대부분 친고죄가 배제돼 있습니다.”

열흘 전 시행된 ‘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을 통해 친고죄가 거의 사라진 마당에 형법상 친고죄 규정까지 없앨 필요가 있는지 판단하자는 취지였다. 법무부 검찰국장 출신인 장 위원장의 지적에 여야 의원들은 반론하지 않았다. 당시 황희철 법무부 차관이 장 위원장을 거들었다.

“친고죄를 연구해봤지만 성폭행범의 경우 몇 개 남아있지 않습니다.”

박영선 의원이 “외국은 친고죄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라고 맞섰다. 하지만 판세를 뒤집을 ‘팩트’가 없었다. “좀 더 검토해보자”는 기약 없는 다짐과 함께 회의는 끝났다.

당시 대부분의 성범죄에 친고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법조문을 읽어 보면 정확하지 않은 추론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장 위원장이 거론한 성폭력특별법 15조는 공중장소에서의 추행,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등의 경우 고소가 있어야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외 다른 성범죄’는 친고죄가 아니라고 추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폭력특별법에 명시된 ‘그 외 다른 성범죄’는 특수강간과 장애인 간음, 미성년자 강간 등 가중처벌이 필요한 소수의 특수범죄뿐이다. 형법에 나오는 강간과 강제추행 등 일반적인 성범죄는 그 안에 없다. 형법을 고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성범죄가 친고죄 적용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에 법조인 출신 의원들과 법무부 차관, 검찰국장, 법원행정처 차장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장 위원장의 법 해석에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튿날 본회의에서 몇몇 의원이 “왜 친고죄를 그대로 두느냐”고 항의한 것을 끝으로 관련 논의는 국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성폭력 친고죄 조항은 3년 뒤인 2013년 6월에야 폐지됐다. 늦어진 정의의 대가를 요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자가 치르고 있다. 그 3년 동안 벌어진 성폭력에는 지금의 정의가 닿지 않는다.

그날 법사위 회의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습 성폭력 가중처벌 조항을 넣었다. 그 덕분에 2013년 6월 이전이라도 상습성이 입증되면 처벌할 길이 열렸다. 하지만 법사위원들은 이때도 오류를 범했다. ‘상습’ 문구를 형법에만 넣었다. 성폭력특별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특별법에 들어 있는 ‘업무상 위력 추행’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처럼 직장에서 하급자를 유린하는 상급자를 벌하는 조항이다. 이런 추행이야말로 가장 상습적으로 벌어지지만 8년 전 입법 과실 탓에 가중 처벌할 수 없다. 한 의원이 2015년 이를 바로잡는 법안을 냈지만 논의가 헛돌다 19대 국회 만료로 폐기됐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감수하며 연일 힘겹게 아픔을 꺼내놓는다. 눈물로 만든 진전의 기회를 입법자들이 허무하게 날리지 않았으면 한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성폭력 친고죄 규정#성폭력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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