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워싱턴에서 환호는 잠시 잊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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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한국에선 온통 문재인, 문재인이다.

‘박근혜 기저 효과’ 덕도 있겠지만 임기 초 새 대통령에게 이 정도로 호의적인 여론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일부 여론조사에선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87%까지 나온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위장전입 의혹으로 인사 청문 절차가 난관에 봉착했지만 문 대통령의 해명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다시 반전될 조짐이다. 취임 초 보여준 잇따른 소통, 탈권위 행보로 얻은 점수를 까먹었단 말도 있지만 낙마(落馬)가 줄을 잇던 역대 정권 초의 난맥상에 비해서는 혼란의 정도가 덜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도 문 대통령 관련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을 보면 거의 아이돌 스타에게 열광하는 ‘팬덤(fandom)’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미국 워싱턴에선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인기가 생각보다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러시아 내통 의혹 스캔들로 특검 수사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 새 대통령의 선전(善戰)에 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기자에게 “문 대통령이 요즘 잘나간다는데 트럼프 빼고 역대 미 대통령도 초반엔 다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일부 외신이 문 대통령의 소식을 전하고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9일 “한국민들의 새 정부에 대한 기대심리가 ‘달빛처럼 빛난다(Moon Glow)’”고 전했다. 하지만 이는 서울발 기사라서 워싱턴의 기류와는 좀 온도 차가 있다.

청와대가 들으면 김샐 수 있는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에 오기 전에 임기 초의 감흥이나 흥분을 좀 가라앉히길 권하고 싶어서다. 지나친 자신감은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평가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잘나가는데 미국에서도 알아주겠지? 백악관 입장에선 문 대통령과 부딪혀 토론하지도 않았는데 대선 전 갖고 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안감을 하루아침에 떨쳐낼 이유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초반 기세와는 별개로 한미 동맹, 한반도 상황은 엄중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유럽 방문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을 향해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끌어올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비용 청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이슈를 꺼내지 말란 법이 없다. 초면이라고 “촛불 민심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는 식의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건 트럼프 스타일이 아니다. 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 도발이라 문 대통령이 대화론을 꺼내기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다.

문 대통령의 가장 인상적인 면모는 국정운영 유경험자로서의 노하우와 자세를 꼽고 싶다. 오래 준비한 듯, 심지어 노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국정 운영에 중도 및 보수층 일부도 안도하면서 지지 여론이 확산되는 것이다. 트럼프와 가장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워싱턴행 공군 1호기에 탑승하기 전 다시 냉철하게 호흡을 가다듬기 바란다. 미국 사람들이 큰일을 앞두고 자주 쓰는 말 중에 “I need fresh eyes”라는 게 있다. 기존 평가와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과 각오로 상황을 본다는 뜻이다. 자신에 대한 환호를 잠시 잊고, 눈을 더욱 부릅뜬 채 트럼프와 백악관 정상회담장에 들어서는 문 대통령을 워싱턴에서 마주하길 기대한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사드#fta 재협상#i need fresh eyes#문재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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