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동정민]유럽식 연정에 숨겨진 비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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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올해 대선의 시대정신은 ‘소통’이다. 불통 정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차기 정부에 연정 혹은 연정 수준의 협치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연정은 1위 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당, 심지어 이념이 다른 제1야당과도 권력과 책임을 나누는 최고도의 협치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여야 정당이 대연정을 이뤄 공동정부를 꾸리면 안정적이면서도 추진력 있게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우리 정치권 정서상 권력 독점을 눈앞에 둔 1위 후보가 다른 정당, 심지어 야당과 권력을 나누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그건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최근 유럽 선거를 들여다보면 연정은 권력을 배분하는 정권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일반적이다. 연정은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지만 야당에는 정권에 존재감이 눌리고 전통 지지층은 잃는 ‘독배’가 될 확률이 크다.

유럽 실례를 들어보자. 여당과 제1야당이 대연정을 이룬 네덜란드와 독일은 둘 다 실업률 5%대에 유럽 경제성장률 1, 2위를 달리는 가장 잘나가는 국가다. 그 바탕에는 연정을 통한 안정된 정치가 톡톡히 한몫했다. 2012년 38석으로 2위를 차지한 좌파 성향의 네덜란드 노동당은 중도 우파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한 뒤 정권의 긴축 정책에 협조하며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독일이 추진한 ‘인더스트리 4.0’에서 나왔다. 2013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기독민주당과 지그마어 가브리엘이 이끄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은 연정 구성에 합의하면서 추진 과제로 인더스트리 4.0 미래 전략을 포함시켰다. 이후 법도 예산도 일사천리로 통과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당시 야당 사민당이 집권당의 발목을 잡으며 1, 2년만 지체했어도 4차 산업혁명 선도 국가의 프리미엄은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가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2013년 총선에서 패배한 사민당 가브리엘이 연정을 택할 때 당내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다. 2005년 사민당이 기민당과 연정을 구성한 후 다음 총선에서 참패한 악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협력을 택했고 메르켈 정부에서 부총리 겸 경제장관을 지내며 최고의 경제 호황기를 함께 이끌었다.

하지만 ‘독배의 악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연정 후 가브리엘의 지지율은 늘 메르켈에 눌려 20%대에 머물렀다. 그러자 올가을 총선을 앞두고 당연히 그의 차지로 예상됐던 사민당 총리 후보 자리는 한순간에 마르틴 슐츠에게 돌아가 버렸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총선에서 노동당은 9석이라는, 1946년 창당 이래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그런데도 왜 유럽 야당은 연정을 택하는 것일까. 우선 연정을 구성하는 집권당이 확실히 권력을 배분한다. 2013년 독일 기민당은 연정 구성을 위해 사민당이 주장하는 최저임금제 도입, 이중 국적 허용, 연금 수령 연령 조기 개시 공약을 모두 받아들였고 장관을 반반(6 대 6)씩 나누기로 약속했다. 지금까지 이 신의는 깨진 적이 없다. 다당제 정치구조하에서 야당도 여당의 발목만 잡아서는 정권을 잡기 어렵다. 국민들이 다른 야당을 택할 대안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는 ‘여당 2중대’가 안 되기 위해 사사건건 비판부터 하고 보자는 야당과 그런 야당을 상종 못 할 종자로 폄훼하며 말도 하지 말자는 정권이 아귀다툼을 하는 수준이다. 다당제로 치러지는 5월 9일 대선에서 어느 정권이 이겨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다. 협치가 불가피한 지금이 오히려 좋은 기회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시대정신 소통#4차 산업혁명#인더스트리 4.0#유럽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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