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日, 한국이 ‘그만 됐다’ 용서할 때까지 사죄의 마음 가져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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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큰절 참배 하토야마 유키오 前 일본 총리

《 광복 70주년을 앞둔 지난달 12일 한국인들은 처음 보는 한 전직 일본 총리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로 참배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68) 전 총리 얘기다. 도쿄(東京)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8일 그를 찾았다. 1년 8개월 만이었다. 아카사카에 있던 그의 사무실은 일본의 정치 일번지로 불리는 나가타(永田) 정의 한 오피스텔 건물로 이전해 있었다. 맞은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안보법제 강행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포위한 총리 관저와 의회였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왼쪽 우편함에 입주 법인들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하토야마 전 총리 사무실 우편함은 ‘○호실’이라는 숫자 외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일본에서 ‘국적(國賊)’으로까지 비판받는 하토야마 전 총리 측의 자구책일 터이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사무실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토야마 전 총리가 직접 나와 악수를 청했다. 여전히 젊어 보였다. 예정시간을 넘겨 1시간 반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는 의자 끝에 바짝 당겨 앉아 기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답했다. 》

진짜 억지력은 군사력 아닌 외교력

먼저 서대문형무소 방문 이유부터 들었다.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앞두고 우려가 커지고 있던 가운데 이부영 선생의 권유로 방문하게 됐다. 헌화대 앞에 막상 서니 선 채로 참배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큰절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대단하게 얘기할 것은 없고 자연스러운 사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국익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진정 용기가 있다면 우리가 과거 잘못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솔직하게 사죄하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다.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內田樹)는 ‘무한책임’이라는 말을 쓰는데 상대가 용서해 이제 더는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한일 우호 발전이 국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분들이 일본에 하토야마 같은 사람도 있다는 점을 알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이는 장기적인 의미에서 (일본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적이라는 등의 말에 상처받을 일이 전혀 없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사죄 행보를 이어 왔다.


“중국 난징 대학살도 일부 우익이 없었다고 하는데 꼭 가서 직접 보길 바란다.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는데 이를 당시 언론은 좋다면서 선동했다. 이런 현대사를 일본은 너무 가르치지 않아 많은 국민이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진짜 화해를 못하고 있다.”

―일본 국민 중 우파가 늘어난 것 같다. 확실히 변한 것인가.

“일본은 전후 경제 일변도로 성장해 왔으나 최근 20여 년간 갑자기 성장을 멈췄다. 그런 가운데 주변 국가가 점점 발전하는 것을 때로는 질투하게 됐고 그게 이른바 ‘강한 나라’로 보이고 싶다는 정치적 요구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한 나라라는 허세가 국민 사이에 확산됐다는 것이다.”

인터뷰 시점은 아베 정부가 추진하는 안보법제가 의회에서 논란이 되던 시기였다. 사무실로 가던 길에 택시 안에서 본 안보법제 반대 시위대를 떠올리며 질문을 이어 갔다.

―일본 내 중국 위협론은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중국이 군사력을 매년 크게 증강하고 있지만 일본도 중국 위협론을 이용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려 하고 있다. 나는 군사력이 억지력을 높이기보다 긴장을 높여 억지력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억지력이라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력을 얼마나 높이느냐, 아니면 공동체를 얼마나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베의 ‘가치관 외교’ 틀렸다

―아베 총리는 ‘가치관 외교’를 앞세우고 있다.

“가치관 외교는 가치관이 같은 나라끼리 협력해 가치관이 다른 나라를 억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른 나라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름을 인정하고 의견을 나눠 가며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게 인간 사회의 지혜다. 그러므로 가치관 외교의 생각하는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19일 새벽 안보법제가 강행 통과됐다. 비서를 통해 e메일로 소감을 묻자 “분노를 금치 못한다”며 다음과 같은 답이 왔다.

“법안에 의회가 견제하는 조항이 있지만 자민당이 중·참의원에서 압도적 의석을 가진 현재 상태라면 무용지물이다. 다만 이번 사태를 통해 국민, 특히 젊은 층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등 일본에 새로운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있다. 과거 역사를 확실히 청산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겠다.”

아베 총리가 ‘가치관 외교’를 외친다면 하토야마 전 총리의 외교 노선은 ‘우애(友愛) 외교’다. 1955년 창당한 자민당 초대 총재를 지낸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의 ‘공동체’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평가다. 그는 2013년부터 명함의 한자 이름도 ‘由紀夫(유키오)’에서 ‘友紀夫’로 바꿨다. 일본어 발음은 똑같다.

―우애 외교는 조부의 영향인가.

“조부가 붓글씨로 우애라는 글자를 자주 써 주셨지만 직접 가르쳐 준 것은 아니다. 나의 출발점은 조부가 ‘자유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칼레르기의 책이다(쿠덴호프칼레르기는 유럽 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다. 책의 원제는 ‘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 20세기는 자유와 평등이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에 빠진 공산주의라는 양 극단이 충돌한 시기다. 이를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을 양립시키기 위해 쿠덴호프칼레르기가 주목한 것은 우애다. 그 핵심이 ‘자립과 공생’이다. 국가도 혼자 살아갈 수는 없으니 주변 국가와 공생해야 한다는 게 우애다. 체제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싫어할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서로 좋은 점을 배워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게 우애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정치 명문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고도 공학을 전공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건 50년 전 얘기인데 일본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엔지니어링이나 기술 부문 인재가 요구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적합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게도 이런(내성적) 성격이기 때문에 정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로 떠드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흥미를 가진 쪽은 바이오 테크놀로지나 컴퓨터 분야였다.”

정치가는 이상을 말해야

―그런데도 정치인이 됐다.

“유학차 미국에 가서 보니 일본이 너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건국 200주년을 맞아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인은 일본인인 점에 그다지 자부심을 갖지 않았다. 일본인이란 게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나가는 중에 호불호와는 별개로 정치의 세계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또 하나는 아내가 ‘나 응원할 거야’ ‘나는 사람 관리에 자신이 있으니 하세요’라고 말해 줬다. 보통은 (남편이) 정치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면 아내가 반대하는 법인데….”

부인 미유키(辛) 여사는 소문난 한류 팬이다. 지금도 한류 드라마를 즐기는지 물어봤다.

“70회나 100회짜리 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보고 있다. 배우 이서진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다소 자극적인 질문을 마지막에 던졌다. “도련님이랄까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이 많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하토야마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 (외가 기업인) 브리지스톤 덕에 제법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도련님’이라고 불릴 만한 응석 같은 게 제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비판은 달게 받겠지만 그렇다고 내 정책도 그런 방향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약자에게 좀 더 많은 빛을 비추는 게 (올바른) 정치다. 지금처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한 자가 더 강하게 되는 일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정치가는 이상을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 정치인은 이상을 너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다.”

인터뷰가 끝나고 “시간을 내줘 고맙다”고 하자 오히려 “여러 가지를 생각할 기회를 줘 고맙다”고 답했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오자 배웅하겠다며 복도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다른 사무실에서 한 젊은 여직원이 급히 나오자 황급히 버튼을 눌러 세웠다. 그 여직원이 타자 기자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인간 하토야마의 진면목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前총리는

‘일본의 케네디가(家)’로 불리는 정치 명문 하토야마 집안의 장남으로 1947년 2월 도쿄에서 출생. 군부 독재에 반대한 의회 민주주의자였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가 조부다. 조부는 1955년 당시 사회주의 세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 세력이 합당해 결성한 자민당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 세계적인 타이어업체 브리지스톤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는 외조부다.

도쿄대 공대를 나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일본 센슈(專修)대 경영학부 조교수를 지내다 정계에 입문해 1986년 자민당 후보 로 중의원 선거에 처음 당선했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해 1996년 옛 민주당을 창당했고 2009년 현 민주당으로 정권을 교체해 총리에 올랐다.

집권 당시 전향적인 역사인식으로 한국과 중국의 주목을 받았지만 주일미군 기지인 후텐마 비행장을 미국과의 약속과 달리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언하면서 1년 만에 총리에서 물러났다. 2012년 정계 은퇴 뒤로도 우파 정권에 거슬리는 행보를 계속해 ‘우주인’ ‘국적(國賊)’ 등으로 비판받아 왔다. 현재는 자신이 설립한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에서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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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손짓을 섞어가며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의회를 통과한 안보법제에 대해 “군사력이 긴장을 높여 오히려 억지력을 잃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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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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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명함.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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