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바로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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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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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들은 풍문이다. 만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을 대량 학살할 명단이 마련됐다는 끔찍한 얘기였다. 그 뒤에도 풍문은 이따금 꼬리를 물곤 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일본 본토를 ‘초토작전’ 끝에 내주게 된다면 그때는 한반도로 후퇴해 결사항전을 계속한다, 그러자면 배후의 안전을 위해 잠재적 저항세력이 될 식민지의 지식인을 죄다 숙청해버린다, 그 살생부가 마련됐다는 말이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이 홀로코스트 계획은 20년이 지난 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실체를 확인하게 됐다.

원로 언론인 종석 유광렬(種石 柳光烈·1898∼1981) 선생은 1974년 봄 한국일보에 ‘나의 이력서’를 연재했다. 1970년 전후 30대 중반의 나는 70대 초반의 종석과 같은 회사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어 신문사를 그만둔 뒤에도 그의 ‘이력서’는 관심을 갖고 읽었다. 연재가 49회로 접어들면서 종석은 한국인 대량학살계획에 관해 구체적인 증언을 해주고 있었다(한국일보 1974년 5월 9일자 4면). 몇 군데 인용해 본다.

“1944년 들어 싸움터가 점점 일본 본토로 다가오자 일본은 미군의 일본 및 한국 상륙에 대비, 우리나라 지식인을 전부 학살하려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해 초 종석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인 최(崔)모를 만나자 그가 반색을 하며 다가오면서 “제가 고등계 주임으로 있는 동안 선생님하나 못 살리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더라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지식인 몰살계획

광복이 된 다음 “해방 전 우리 집에 와 내 이력을 조사해간 교야마(京山)라는 한국인 형사를 만났더니 ‘일본은 우리나라 지식인을 전부 죽이기 위해 북악산 밑에 큰 구덩이를 파고 리스트도 작성했는데 나도 들어 있었다’”던가.

그렇대서 종석은 항일운동을 한 사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중일전쟁 때 중국전선에 종군하여…친일 논설이 다수 남아 있다” 해서 2008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도 올라있다.(이상 위키백과에서)

‘나의 이력서’를 오려둔 35년 전의 누런 신문 조각을 찾기 위해 이틀 동안 서재와 서고를 뒤졌다. 그렇게까지 해 그를 찾으려 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패전을 앞두고 단말마처럼 광분한 일제(日帝)로부터 겁탈당한 이 겨레의 ‘과거사 바로 세우기’가 제 궤도를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겁탈당한 피해자에게 반항을 했느냐 안 했느냐, 또는 강도에게 10만 원을 주었느냐 100만 원을 주었느냐 하는 ‘진상규명’에만 엄청난 예산과 시간을 쏟고, 막상 겁탈한 강도와 그 죄상은 추궁도 않고 남의 일처럼 불문에 부치고 있다.

종석의 증언으로 조선지식인 대량학살계획 명단은 실재가 확인됐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만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친일 인사’ 명단에 등재된 김성수 방응모 현상윤 백낙준 김활란 등등. 과연 그들의 이름을 일제의 지식인 대량학살 명단엔 친일 인사라 하고 빼주었을까. 우리야 그걸 알 수 없다. 하지만 4년 세월에 377억 원 예산을 받아쓴 규명위원회는 최소한 그런 살생부쯤은 확보하고 누가 진짜 친일파고 누가 무늬만의 친일파인지 가려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독일은 과거사에 진정 어린 속죄를 한 데 반해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두 가해자의 잘잘못을 따져왔다. 그러나 유럽과 극동은 피해자 사이에도 잘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치스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풀려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사이먼 비젠탈(1908∼2005)은 고향에 돌아오자 곧 자기 집에 ‘유대인박해기록센터’를 설립해 정부의 예산지원 없이 맨몸으로 나치스의 범죄와 가해자의 추적에 나섰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에 잠복한 아우슈비츠의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을 16년 만에 잡아 온 것도 비젠탈의 공이었다.

‘겁탈 강도죄’나 제대로 물어라

그에 반해 우리는 일제치하에 얼마나 많은 우리 젊은이가 어떻게 징용에, 징병에 끌려갔는지, 얼마나 많은 처녀가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조차 않는다. 어쩌다 양심적인 일본인이 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면 그걸 갖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다. 그래 가지고 과연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 속죄할까. ‘과거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바로 세워져 있는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인사말> 최정호 칼럼을 끝맺습니다. 지난 5년간 귀중한 지면을 내주신 동아일보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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