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말의 힘, 힘의 말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어제 아침 조간신문의 1면은 극명하게 양분된 두 세계를 보여주었다. 한쪽에는 대형 참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대형 축제가 있었다. 한쪽에는 벌거벗은 폭력의 난투극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잘 다듬은 언어의 식전이 있었다. 거기에 어떤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양쪽엔 다 같이 큰 힘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큰 힘이 실렸다는 점이다. 힘은 같은 힘이지만 한쪽에는 폭력의 힘이, 다른 한쪽에는 언어의 힘이 발휘되고 있다. 한쪽에는 ‘힘의 말’이 불을 뿜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말의 힘’이 불을 뿜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나라 신문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당선인의 취임식을 1면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세계적인 톱기사도 우리나라에선 여섯 명의 귀한 인명을 희생시킨 서울 용산의 재개발에 항의하는 철거민 농성의 진압과정이 빚은 참사에 밀리고 말았다.

널리 예고된 세계적인 이벤트를 밀어낸 예측 못한 국내적 참사의 돌발로 한국과 세계가 갈라진 듯이 느낀다는 것은 물론 단락(短絡)적인 속단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용산의 참사가 전혀 우연의 참사라고만은 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일회적인 돌발 사고가 아니라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는 이 땅의 ‘폭력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의 문화는 용산의 재개발 지역만이 아니라 한국정치의 본무대인 국회의사당에서까지 금배지를 단 선량에 의해 최근 시위된 것을 우리는 TV중계를 통해서 생생히 목격했다.

오바마 취임과 ‘용산 참사’

예후디 메뉴인은 “음악은 말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는 잠언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음악은 말을 막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폭력도 말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하나 폭력은 말을 아직 할 수 있고 해야 함에도 말을 못하도록 막고, 말을 죽인다. 폭력은 그래 본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메뉴인의 잠언은 그를 뒤집어 봐도 좋다. 말은 음악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고. 물론 더욱 자명하고 절실한 진실은, 말은 폭력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유럽 문명의 한 뿌리인 고대 아테네에서는 이미 2500년 전에 공공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토론과 다수결의 지배를 관철한 직접 민주정치체제를 운용했다. 시민 집회에서의 결의나 배심재판에서의 판결을 좌우하는 것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재주와 입심이었다. ‘힘의 말’이 아니라 ‘말의 힘’이 아테네 민주정치를 떠받친 토대였다.

짐승과 ‘바르바로이(야만인)’의 세계는 폭력이 지배하지만 아테네는 ‘로고스(말, 이치)’가 지배한다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아테네에서 말의 논리학(다이얼렉틱)과 수사학(레토릭)이 발전하고 토론에 기초한 의회민주주의가 발단했던 배경이다.

세계 최강의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은 민주주의 역사의 승리요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 곧 ‘말의 힘’의 일대 개가라 여겨진다. 오바마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은 그의 말이 인종 종교를 초월해서 절대 다수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다. 피부가 검든 희든 옳은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이 했느냐에 따라 말을 버리지 않는다(불이인폐언·不以人廢言)’는 공자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물론 말에도 여러 말이 있다. 이성의 말, 감성의 말이 있다. 내용은 공허해도 화려한 옷을 걸친 수사(修辭)의 말도 있고 어눌하고 꾸밈새는 없으나 진국의 말도 있다. 그러고 보니 폭력도 다양한 의상을 걸치고 나타난다. 검은 색안경에 검은 양복의 의상에서 분홍색 초록색 한복의 의상까지….

희망주는 말과 공포스러운 말

그건 어떻든 오바마 취임사의 이분법을 빌리면 우리에게 ‘힘의 말’은 공포를 주고 ‘말의 힘’은 희망을 준다. 힘의 말은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말의 힘은 화해와 단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어제 아침 조간신문의 양분된 두 머리기사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봤다. 군부정권의 외부폭력이 제거됐다 해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국회의사당이 말의 힘이 아니라 힘의 말에 의해 문이 잠기고 말문이 막힌다면 민주주의는 숨을 쉴 수 없다. 민주주의는 말과 더불어 살고 말과 더불어 죽는다. 그리고 말은 폭력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국회의사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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