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대통령에게 ‘영부인’이 필요한 걸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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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처리 맡았던 육영수 여사… 청와대 신문고-청와대속 야당 역할
대통령이 어머니 본받는 건 좋다, 그러나 민원담당은 뭘 하고 있나
“국내 브랜드 의상 입으시라” “민원보다 큰 그림에 몰두하라”
이런 쓴소리 누가 해야 하는가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불통 논란’을 빚었던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은 안타까워 죽겠는 모양이다. 국민의 삶을 소리 없이 챙기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한 소통임을 입증하기 위해선지 어제는 민원처리 현황 ‘보도 참고자료’를 내놨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취미로, 취미라면 어폐가 있지만” 하며 소통의 예로 민원 챙기기를 들었듯이, 어쩌면 대통령한테는 그게 취미이자 유일한 낙(樂)일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국민 모두를 잘살게 하느냐는 생각 외에는 다 번뇌라는 대통령에게 다른 취미를 가지라든가 생각의 폭을 넓히라는 주문은 불충이 될 수도 있다.

“어머니는 청와대 사람들로부터 ‘신문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편지 한 통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직접 챙기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대통령은 2007년에 나온 자서전에서 소개했다. 민원 처리를 주 업무로 하는 영부인 비서실을 처음 공식화한 사람도 육영수 여사였다.

대통령 부인의 민원 담당 역할은 그러나 육 여사가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었다. 민원은 민원비서관에게 넘어갔고, 새세대육영회나 한식세계화 사업에 나섰던 두 여사님 말고는 대통령 점수 깎아먹지 않기가 대통령 부인의 주 임무가 됐다.

민원 처리보다 육 여사를 포함해 이들이 해온 진짜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청와대 속 야당 역할이다. 퍼스트레이디는 대통령의 첫 번째 특별 조언자이고 부통령은 두 번째 조언자라고 미국 하버드대 토머스 패터슨 교수는 규정했다. 육 여사가 직접 민원을 챙긴 것도 정보와 민심이 차단되면 대통령을 망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노태우 대통령한테 제일 먼저 ‘물태우’라는 별명을 전한 사람도 부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권양숙 여사가 “무슨 무슨 신문사하고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싫은 소리를 했다고 당시 홍보수석은 전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이동관 전 홍보수석은 “인터넷이 전체 여론도 아니고 보고라인에선 쓴소리 필터링이 돼 올라가기 때문에 심한 얘기는 대통령 부인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여성 대통령에게는 이런 부인이 없다. 대통령이 인터넷 악플까지 다 본다지만, 내게 오는 악플만 봐도 정작 가슴에 새겨야 할 지적은 많지가 않다. 퍼스트 도그(first dog) 새롬이와 희망이가 대통령의 혼잣말 상대는 될지언정 대화 파트너는 못 된다. 하다못해 “대통령은 뭘 입어도 옷태가 나지만 좀 구닥다리 느낌이다. 국내 디자이너, 국내 브랜드 옷을 입어주는 것도 창조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같은 말을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대통령의 세심한 민원 처리가 나쁘달 순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여사님 역할까지 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하긴 어렵다. 더구나 육 여사 때는 국민이 대통령 부인 말고는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었던 유신체제였고, 정부의 능력은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회안전망도 턱없이 모자란 시대였다. 대통령이 당시의 어머니처럼 민원을 챙겨야 한다면 나라가 1960, 70년대로 돌아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대통령이 민원 처리에 부심하는 것도 ‘신문고를 두드린 백성의 한을 풀어준다’는 권위주의적 여왕 마인드로 보는 시각이 있다. 대통령 눈에 띄지 못한 민원은 영영 해결되지 못할 공산도 크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직접 민원까지 챙기지 않도록 제대로 보좌하겠다”는 자성(自省)의 직언을 하기는커녕 성군(聖君) 칭송형 참고자료나 만드는 보좌진은 위험하다.

청와대에는 민원비서관이 있고, 세계 최고수준의 온라인 민원 포털 사이트를 자랑하는 ‘민원 24’에, 정부에 대한 모든 민원과 제안을 처리한다는 국민신문고에, 심지어 국민권익위원회까지 국민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대통령한테 민원처리를 앙망하는 국민이 늘어나는 것은 담당 공복(公僕)이 무능하거나 직무유기를 하거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대통령이 가끔 민원 편지를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철저한 민원처리를 그렇게 여러 차례 지시했는데도 이 지경이면 민원비서관부터 부처 담당자, 사후에도 법과 제도를 정비하지 못한 장관까지 문책하고 유능한 사람을 들이는 것이 차라리 빠른 해결책이다.

영부인이 없어도 국정 최고책임자는 민원 해결로 애태울 시간에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한 비전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 많은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안 그래도 내 혈세로 봉급 받는 공직자들이 밥값을 안 해서 국민은 분노하다 못해 지쳐가고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영부인#국민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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