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일본[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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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미군 폭격기의 행동반경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부터 이런 사태를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에 필요한 대비가 돼 있다. 적은 틀림없이 육해공군 연합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저서 ‘국화와 칼’에 나오는 대목이다. 일본 지도자들은 태평양전쟁 때 파국적 상황 앞에서도 “이미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돌아가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국민을 속였다. 그들은 미군이 일본 점령지를 함락시킬 때, 미군이 일본 본토를 폭격할 때도 “예상대로 돌아간다”고 호도했다.

놀랍게도 당시 일본 국민들은 지도자의 말을 믿었다. 눈앞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졌지만,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일본군이 승리했다. 베네딕트는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었다. 일본 지도자의 술책이 점차 극단적으로 치달았다”고 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느낌이다. 일본 정부는 중증자 중심으로 대책을 세웠고, 감염자와 밀접하게 접촉한 사람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바이러스 검사를 받도록 했다. 또 ‘대규모’ 이벤트를 자제토록 요청했다.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정부 예상대로 일본인들을 움직이게끔 만들고 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11일 트위터에 “코로나19 불안을 느끼는 분에게 유전자 증폭(PCR) 검사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싶다. 먼저 100만 명 분량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고 글을 남겼다. 8700여 개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안정적인 현재 의료체계가 붕괴된다”, “테러다” 등 부정적 내용이었다. 갑자기 환자가 쏟아지면 병상 부족 등 예상 밖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일본인들은 의외로 코로나19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도쿄 시내를 일주하는 JR야마노테선에 최근 다카나와게이트웨이역이 새로 생겼다. 1971년 이후 처음 야마노테선에 새 역이 생긴 것이다. 14일 개통식이 취소됐음에도 도쿄도민 수천 명이 몰려 새 역을 구경했다. 절반가량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10, 20대에 인기가 많은 도쿄 하라주쿠를 주말에 들르면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붐빈다. 일본 정부의 대규모 이벤트 자제 요청을 어기는 것일까. ‘대규모’의 구분이 애매하다 보니 젊은층 중심으로 거리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 처지에선 정부 예상을 깨지 않았다.

정부나 정치 지도자의 예상대로 국민들이 움직이면 일사불란하고 단합된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비용도 치러야 한다. 태평양전쟁 때는 패전을 눈앞에 두고서도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에 종전이 지연됐고, 그만큼 희생자들이 늘어났다.

현재는 감염자가 태연히 내 옆을 걸어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17일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밝힌 국내 감염자 수는 824명(16일 집계 기준, 크루즈선 감염자 712명 제외). 하지만 일본 의료거버넌스 연구소의 가미 마사히로(上昌廣) 이사장은 최근 본보 인터뷰에서 “실제 감염자 수는 무증상 환자를 포함해 1만 명, 아니 1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코로나19#일본인#후생노동성#가이드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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