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책임 떠넘기기 대신 초기 대응 실패 성찰해야[광화문에서/윤완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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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404. 보려는 페이지는 존재하지 않거나 삭제됐습니다.’

중국 매체 차이신(財新) 홈페이지에서 단독 기사 ‘코로나19 유전자 배열 추적, 경보는 언제 울렸나?’라는 기사를 검색하면 이런 메시지가 나온다. ‘404’는 검열 등으로 삭제됐을 때 뜨는 숫자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404’를 검열을 은유하는 풍자에 사용한다.

중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진상을 중국 어떤 매체보다 집요하게 추적해온 차이신에 지난달 26일 올라온 이 기사의 내용을 바로 따로 저장해뒀다. 검열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예상대로 지난달 28일경 이 기사는 홈페이지에서 사라졌다.

내용은 이렇다. 지난해 12월 24일부터 올해 1월 초까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와 상하이(上海) 등지의 유전자 분석 기업 및 기관들이 이미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서 발생한 환자 유전자 샘플 배열 분석을 통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비슷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당국에 보고했지만 돌아온 것은 “유전자 샘플을 소각하고 대외에 공표하지 말라”는 후베이성 당국자의 통보였다. 차이신은 “지난해 12월 말∼올해 1월 초는 수많은 생명의 안위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지만 (당국의 은폐로) 중국인들은 이 바이러스가 훗날 일으킬 후과를 전혀 몰랐다”고 지적했다.

후베이성 이외 지역 환자 증가세가 크게 둔화되면서 상황이 호전되자 중국 당국의 초기 대응을 비판하던 목소리는 검열 등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의 대처를 높이 사는 자찬과 함께 중국의 성과와 달리 한국 일본 등 다른 국가의 대응은 너무 미흡하다는 논조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중국에서 ‘사스 퇴치의 영웅’으로 불리는 중난산(鐘南山) 중국공정원 원사는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12월 초나 올해 1월 초에 엄격한 방역 조치가 있었다면 환자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매체들은 이날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중국이 아닐 수 있다”는 중 원사의 발언만 제목으로 뽑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4일 “바이러스의 근원에 대해 아직 정설이 없다”고 운을 뗀 뒤 “코로나19는 세계 각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도전이다. 중국이 코로나19 재해를 일으켰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 혐오를 키우지 말라는 원칙론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 곳곳에서 이제 ‘청정 지역인 중국을 오염시키지 말라’며 중국에 들어오는 한국인에 대한 혐오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베이징(北京)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한국인 출입을 막는 일까지 발생했다. 배타적 성향 환추(環球)시보의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코로나19 발원지가 미국일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까지 소개했다. 코로나19는 세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국이 초기 대응에 실패한 건 중요하지 않다는 책임 회피 논리가 커지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중국인을 바이러스 취급하지 말라”고 호소하던 중국이 성찰을 미룬 채 똑같은 혐오를 키우고 있다. 중국이 지금 대내외에 보이는 태도는 국제사회가 앞으로 중국을 책임 있는 국가로 인정할지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코로나19#중국 매체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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