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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노벨상… 무게 짓눌리지 않아야[광화문에서/손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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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노벨상… 무게 짓눌리지 않아야[광화문에서/손효림]

손효림 문화부 차장 입력 2019-11-07 03:00수정 2019-11-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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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어려운 연극이라 관객이 얼마나 올지 걱정했어요. 그런데 공연 직전 희곡을 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자 전 회, 전 석이 매진됐어요. 진기록이었죠.”

1969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때를 떠올리며 임영웅 연출가(83)가 한 말이다.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관객들이 몰려온 것. 올해 50주년을 맞은 ‘고도…’는 노벨문학상의 축복(?) 속에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지난달 10일 올가 토카르추크(57·여)와 페터 한트케(77)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예상대로 작품 판매량이 껑충 뛰었다. 올해 1월 출간된 토카르추크의 소설 ‘태고의 시간들’은 9개월간 2000권이 판매됐지만 수상 소식 후 한 달이 채 안 돼 1만5000여 권이 나갔다. 지난달 21일 국내 출간된 ‘방랑자들’은 단 2주 만에 1만5000권 넘게 판매됐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한트케의 작품 역시 수상 후 희곡 ‘관객모독’은 9000여 권,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은 5000여 권이 나갔다. 두 책은 수상 이전에는 올해 월평균 각각 66권, 38권이 판매됐다. ‘관객모독’은 기국서 연출가와 극단76이 1978년 국내에 선보이며 연극계에 신선한 파장을 몰고 왔다.


문학의 위기라고 하지만 노벨문학상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수상자에게 이 상은 양날의 칼과 같다.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지만 상의 무게에 짓눌려 좋은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해 강연만 다녀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도 작가에게는 독이 된다. 상금 900만 스웨덴크로나(약 10억8000만 원)는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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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무크(67)가 ‘순수 박물관’(2008년), ‘내 마음의 낯섦’(2014년)을 발표하자 “노벨상 이후 인생의 역작을 저술한 희귀한 작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수상한 다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내 유명 문학상을 여럿 받은 한 작가는 “첫 책이 크게 성공하면 두 번째 책을 더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엄청나다.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부르는 곳이 많아 집필에 전념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국내도 이런데 세계적인 상을 받으면 부담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무크만큼 수상 이후 활발하게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는 2008년 수상자인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9)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어 자주 방한하는 그는 제주 해녀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 ‘폭풍우’, 서울 곳곳을 세밀하게 비추며 삶을 통찰한 ‘빛나: 서울 하늘 아래’를 출간하는 등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노벨문학상으로 인한 변화를 묻자 그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파리의 아파트를 사느라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을 다 갚게 돼 좋았다”고 답했다. 일상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작가로서의 삶에 충실한 길임을 보여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좋은 작품을 계속 쓸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말에 담겨 있다.

“노벨문학상은 우연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은 글을 쓰는 책상이죠.”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노벨문학상#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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