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수]포퓰리스트 정치인과 행동주의 펀드의 공통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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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 차장
김현수 산업1부 차장
공교롭게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작년과 올해, 그것도 재계 빈소에서 기자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다. “엘리엇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엘리엇 공세로 지배구조 개편안을 철회한 직후였던 지난해 5월에는 묵묵부답이었고, 주주총회를 앞둔 이달 초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1년여가 지나도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의 공세가 여전히 그룹의 골칫거리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달라진 점도 있다. ‘엘리엇이 너무해’ 식의 감정적 대응 대신 곧바로 투자설명회를 열고 미래 수익률 목표치까지 이례적으로 제시했다. 무엇이 주주 이익에 맞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행동을 보이자 주요 의결권 자문사와 2대 주주 국민연금이 긍정적 화답을 보냈다. 현대차·현대모비스 대 엘리엇의 표 대결은 22일 양사 주총에서 결판이 날 예정이다.

사실 정몽구 회장 등 현대차 측 우호 지분을 모두 합하면 29.11%(지난해 9월 기준)이다. 3% 수준의 엘리엇 보유 지분의 10배는 된다. 그런데도 왜 엘리엇 공세에 회사가 긴장하고 온갖 경영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행동주의 펀드와의 전쟁을 보면 수긍이 간다.

행동주의 펀드의 가장 무서운 전술은 주주 마음 흔들기다. 주주 불만이 치솟을 때 깜짝 등장해 공분을 자아내거나 달콤한 이익을 제시하면 적은 지분으로도 이사회 장악 같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이탈리아의 최대 통신사인 텔레콤 이탈리아가 대표 사례다. 2016년 프랑스 미디어그룹 비방디(24%)가 이곳을 인수하자 이탈리아 내 여론이 좋지 않았고 주가도 변변치 않았다. 지난해 5월 엘리엇이 나타나 지분 9%로 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이 회사 이사회 3분의 2를 장악했다.

인터넷 경매로 유명한 미국 이베이는 어떤가. 한때 아마존의 경쟁사였지만 실적이 하락세다. 올 초 엘리엇이 다른 행동주의 펀드와 손잡고 공격하자 결국 이베이가 이사회 2석을 내어주기로 했다. 역사 깊은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은 행동주의 펀드 셔번의 공격을 받고 있다. 투자실적 악화, 브렉시트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로 총체적 난국 상태라 주주 불만이 터져 나오던 중이었다.

열 받은 주주들은 때론 행동주의 펀드의 ‘사이다 발언’이 속 시원하다. 이베이 경영진에게 ‘아마존이 저렇게 클 때 경영진은 뭘 했나’ 식의 펀치를, 프랑스 이사들을 텔레콤 이탈리아에 내세운 비방디를 겨냥해 ‘여기 이탈리아 이사들이 있어요’라고 외치는 식이다. 현대차 주주도 차가 잘 팔릴 때에는 행복했지만 옛 한전 부지 매입, 실적 악화가 이어지자 주가가 하락했고 불만이 커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엘리엇이 나타났고 ‘순이익의 3.5배를 배당으로!’라고 외쳤다. 한국에 반(反)기업 정서가 강해지면서 행동주의 펀드 공격이 늘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브렉시트로 혼란스러운 영국에는 미국 펀드 공격이 늘고 있다고 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사이다 발언에 마음이 흔들리는 주주들에게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들의 진짜 목적’을 고민해보라고 조언했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 지분을 살 때 상당액을 투자은행에서 빌리는데 이때 ‘칼라(collar)’라는 일종의 파생상품을 만들어 손실을 최소화한다. ‘주가 상승’이란 한 배를 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따로 구명보트를 챙겨놓고 있어 일반 주주처럼 온전히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불안한 시기에 듣고 싶은 말만 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 그것도 수틀리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는 그런 부류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현대자동차#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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