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연민이 불법과 만나면 더 이상 선의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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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지난해 1월 그날은 국립암센터 정규직 필기시험을 한 달쯤 앞둔 날이었다. 이 병원 방사선과 임시직 민수(가명·28)는 직속 상사인 A 씨(44·여)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달 뒤 치르게 될 정규직 필기시험 문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민수는 A 씨가 출제위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의 호출에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민수를 앞에 두고 A 씨는 태연하게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민수 씨, 문제에 오탈자가 있는지 봐봐.”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지?’ 민수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A 씨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국립암센터 정규직은 방사선사 자격증을 가진 사회 초년생들에게 꿈의 직장이다. 하루 8시간 근무에 300만 원이 넘는 월급, 게다가 정년보장까지. 민수는 다른 종합병원에서 2년간 경력을 쌓은 뒤 어렵게 임시직 자리를 얻었다. 이때부턴 정규직이 되려고 낮에 일하고 밤에 시험 준비를 하며 1년 넘게 ‘주경야독’했다. 간부들은 민수에 대해 “착실하고 빠릿빠릿하다”며 좋게 평가했다. 정규직 입성이 코앞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시험문제들은 순식간에 머리에 입력됐다. 묘한 흥분과 함께 죄책감이 뒤섞였다. 15분쯤 지났을까. 뒤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부서 간부가 모니터 화면을 보고 만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수와 A 씨를 번갈아 봤다. A 씨는 황급히 환자의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몇 초간 적막이 흘렀다.

며칠 뒤 병원에 소문이 퍼졌다. 시험문제를 미리 본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민수는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무너질 것만 같아 걱정이었다. 고심 끝에 다른 임시직 동료들에게 문제를 알려주기로 했다. 한 명씩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며 시험문제를 보냈다.

‘고마워 오빠. 근데 이렇게 해도 돼?’

‘야 빨리 봐. 나도 겁나.’

필기시험은 지난해 2월 예정대로 치러졌다. ‘문제 유출’이라는 불씨를 안고 있는 이 시험에 178명이 몰렸다. 민수 같은 임시직이 12명, 외부 지원자가 166명이었다. 서울과 수도권 종합병원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방사선사 대부분이 응시할 정도로 격전이었다.

정규직 합격자는 단 3명. 그중 한 명이 민수였다. 매사에 열심이고 일처리가 꼼꼼했던 민수의 합격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합격자 발표 한 달 뒤 정기 감사를 나온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에게 ‘문제 유출’ 제보가 날아들었다. 민수와 A 씨는 조사를 받았고 바로 시인했다. 민수의 합격은 취소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A 씨는 물론이고, 혼자만 시험을 잘 볼까봐 동료들에게 문제를 알려준 민수의 행위 역시 형사처벌 대상(업무방해)이었다.

민수 한 명을 위해 175명의 ‘민수’들을 들러리로 만든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A 씨는 지난달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18년간 일했던 직장 암센터에서도 해임됐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책했다. “민수가 궂은일을 도맡아했어요. 그 절박한 모습에 연민이 들어서 도와주고 싶었던 건데….” 본의 아니게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문 민수 역시 재판에 넘겨질 처지다. 유죄 판결이 나면 앞으로 공립 병원에 취업하기 어렵다.

경기북부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3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A 씨와 민수 사이에 금전 등의 대가가 오간 건 없었다고 밝혔다. A 씨는 민수를 돕고 싶었을 것이고, 민수 역시 호의를 마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그릇된 온정에 한 청춘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법의 경계를 넘는 순간 이타심은 더 이상 선의가 아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국립암센터#문제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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