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희망의 씨앗을 심자[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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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시국서 정치권 무능은 참담… 질본-장애인 단체는 ‘영웅적 희생’
지역 사회 지킬 밀착형 조직 필요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불안했다.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만 해도 한 지방에서 창궐했다가 없어질 감염병 정도로 여겼다. 한국 방역 당국이 30명 선에서 확진자를 억제하고 있을 때만 해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의 아픔을 딛고 만든 방역체계를 믿었고 정부 역량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천지에서 감염자가 나오고, 닫힌 공간에서 빽빽이 앉아 치르는 이들의 의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게 변했다. 공동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신천지의 상식에서 벗어난 비협조가 공분을 자아낼 즈음엔 이미 확진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나를 지키고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인데 그 마스크를 살 수가 없다.

참담했다. 국민은 일상을 포기하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의 실언과 기회주의적인 행태는 모두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청와대는 뻑적지근한 승리 선언을 내심 기대하며 일상생활을 지속하라는 호기를 부리다 머쓱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확진자 수가 정체되는 동안 상대적 우월성에 취해 있다가 지역 사회 감염으로 확산되자 사태의 원인을 ‘이단’ 신천지에 돌렸다. 미래통합당은 현 상황에서 실효성 없는 중국인 입국 금지 제안만 지겹도록 되풀이한다. 그사이 오히려 중국이 한국에서 오는 모든 것을 차단해 버렸다. 여당은 야당의 비례 정당을 우회할 다른 꼼수를 구상 중이다. 야당은 대구에서 ‘이게 누구 때문이냐’는 분노를 자극해 표심을 움직이려 한다. 상황 수습에 대한 초당적 협력은 선택지에조차 없다. 확실히 한국에서 정치란 일본에서의 지진처럼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재난’이다.

무력했다. 대구경북의 지방정부는 여전히 허둥대고 있다. 총리가 대구에 가 있고 질병관리본부가 지방정부의 빈 부분을 메우고 있지만, 중앙과 지방의 유기적 방역 거버넌스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민단체도 평소의 기세등등한 목소리를 잃었다. 기업 감시나 입법과 같은 생색낼 수 있는 사안에는 조직력을 과시하지만, 감염병 전쟁에서는 무력한 소시민이 된 듯하다. 민주화운동 원로로 구성된 주권자전국회의는 민주당에 미래한국당 저지와 정치개혁 완수를 위한 가칭 ‘정치개혁연합’ 창당을 제안했다. 시민사회는 지나치게 정치화되었고, 그래서 시민에게는 너무 먼 존재다.

여전히 두렵지만, 희망은 있다. 확진자가 3000명을 넘었고 서울도 그 수가 100명에 가깝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송구하다고 사과했지만, 아직 마스크를 구하기 어렵다. 수준 낮은 정치가 갑자기 환골탈태하리란 기대를 할 수도 없다. 권력과 자본에 해바라기인 시민사회가 지역민 중심의 조직으로 거듭나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러나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은 있다. 전문가와 실무자로 구성된 질본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원과 권한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영웅적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애인 단체들은 감염의 위험 속에서도 청도대남병원 정신병동에 장기간 수용되었던 확진자들처럼 방역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시민건강연구소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감염병 대책을 지역 사회와 함께 풀어가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실력 있는 정치인도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4일 국무회의에 참석해 일찍이 마스크 수급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자가 격리 불응자 대처를 위한 중앙정부-지자체 간 협조의 필요성을 주장하더니, 신천지 회원 명부가 부실한 점을 신속하게 확인하고 과감한 결단을 통해 도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켰다.

이제 단단한 희망의 씨앗을 지역에 심자.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모르는 캄캄한 터널을 떨며 지나고 있다. 이를 지나면 다른 어떤 터널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도 겪게 될 감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 사회에서의 조직화가 필요하다. 최소한의 안전 수단인 마스크를 원활하게 보급할 수 있는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생활밀착형 조직이 필요하다. 지역 특성에 맞는 시민의 연결망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건강 약자를 보호하며, 주민이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된다. 지역 내 연대가 희망의 씨앗이다. 대구에서 병상이 부족한데 지방정부가 우왕좌왕한다면 이를 공론화해 강제할 수 있는 문제 해결형 조직이 필요하다. 정치와 감염병을 포함한 모든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진짜’ 시민사회를 이제부터라도 만들자. 그래야 시간이 흐른 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 했던 자책을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살릴 수 있었어, 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좀 더 구할 수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할 수도….”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코로나19#정치권 무능#생활밀착형 조직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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