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상준]법에 대한 존중이 아쉬운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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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공사-층간소음 분쟁 본 적 없어… 법으로 정한 방음장치 잘돼 있기 때문
한국은 ‘법대로 하자’에 불신
法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선하게 사는 이들 이용당하기 쉬워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수년 전 일본의 한 병원에서 인상 깊은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음식을 남긴 손님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식당 종업원이 그려진 그림 위에 ‘음식 남기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도 어린 시절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아마 일본에도 같은 문화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인병 환자가 날로 늘어나자, 음식을 남기는 것이 낫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런 포스터를 붙인 것 같다.

삶의 환경이 변하고 공동체에 새로운 과제가 등장하면 공동체 구성원의 인식에도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인식의 전환이 있다면 나는 그중 하나로 ‘법대로 하자’는 말이 주는 어감을 꼽고 싶다. 한국 드라마에서 법대로 하자는 사람은 거의 항상 냉혹하고 비정하게 묘사된다. 아마 일제강점기와 독재 시대를 겪으며, 법이 무법한 권력자에 의해 오용된 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이미 오래고, 법률 서비스의 문턱이 상당히 낮아진 지금도 법대로 하자는 말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 도쿄의 한 아파트 분양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대로변에 있는 상가를 헐고 거기에 15층 아파트를 짓고 있었는데, 아파트 뒤로는 주택가가 있었다. 주택가 옆에 15층 건물을 지으면 주민의 반발이 거세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관련된 모든 법규를 준수했기 때문에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의 대형병원이 병동을 허무는 공사를 하게 돼 주민 설명회를 열었다. 인근 주민들은 법에서 정한 모든 규정을 제대로 지키며 공사할 것을 요구했고, 건설회사 측은 주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모든 규정을 성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꽤 긴장감이 감도는 설명회였지만 그렇게 단 한 번의 만남 이후로는 서로 간에 볼일도 따질 일도 더 이상 없었다.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경탄하고 부러워한다. 현행법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면 언제라도 개정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성장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법을 존중하는 문화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각종 규약과 계약의 세부 조항을 명문화하기도 쉽지 않을 때가 많다.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말을 바꾸는 일은 우리 주위에 아직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구두로 한 계약을 문서로 작성하자고 하면 ‘법대로 하는’ 비정한 인간으로 비난받기 쉽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의 부모가 거액의 사기를 친 뒤 국외로 이주한 것이 밝혀져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피해자 중에 피해 금액을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법이 보장한 최소한의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서를 작성하지 않고 구두로만 변제를 약속받은 사람의 피해는 아마도 구제받기 힘들 것이다.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전혀 기억에 없다”라고 하면 어느 쪽이 진실을 얘기하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가끔 신문의 사회면을 우울하게 장식하는 층간소음 분쟁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다. 도쿄의 아파트에 산 지 15년이 되었지만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쟁은 겪은 적도 목격한 적도 없다. 이웃에 대한 일본인들의 배려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방음장치가 제대로 돼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독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쟁이 심한 것은 건설법에 문제가 있거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선하게 사는 사람이 배신당하고 이용당하기 쉽다. 그런 사회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그래서 사적 분쟁이 생기면 목소리를 먼저 높이게 되고, 거기에서 오는 피로감이 상당하다. 법대로 하자는 것은 결코 나쁜 말이 아니다. 성인병과 싸우기 위해서는 음식을 남기는 것이 낫듯이,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대로 하는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민주주의#법률 서비스#법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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