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재경]과거사와 공소시효 제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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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의 사건’ 등 과거사 재조사, 공소시효 난관 피할 묘수 찾아야
기술 발달, 인간 수명 증가로 범죄 처벌 시효 폐지 주장 커져
정의와 인권, 이상과 현실의 조화… 공동체가 함께 선택할 문제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현 정부 출범과 함께 부처마다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던 과거사 규명 특별기구의 활동이 대부분 종료되었다. 반면 법무부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여전히 가동 중이다. 소위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 등 현재 떠들썩한 사건들을 모두 조사하고 있다. 대통령의 철저한 조사 지시가 있은 뒤로는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느낌이다.

오래전의 일이라 진상 규명에 애로를 겪으면서 공소시효의 난관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중대 범죄 혐의를 찾는 등 법리적 묘수풀이가 한창이다. 공소시효는 범죄 발생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소추권을 소멸시키는 제도다. 고대 로마법에 뿌리를 두고,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대륙법계 국가들에서 채택되었으며 이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프랑스와 일본을 거쳐 근대 문명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시효의 완성은 범죄자에게 지옥에서 만난 부처님 설법이자 예수님 복음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고통을 겪어온 피해자나 유족에게는 국가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해 복수해주지 못한다는 절망의 선언이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정의의 추구를 생명으로 하는 법이 무엇 때문에 응보(應報)의 칼날을 거두는 것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면, 범죄에 대한 사회와 피해자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처벌의 필요성도 줄어든다. 시간의 경과로 만들어진 법적 안정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이 점차 흐려지고, 객관적 증거가 사라져 진실 발견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공정한 재판과 인권 보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공소시효 제도가 형사사법 절차에서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공정한 재판을 담보하는 인권 보장적 제도로 긍정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명백하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삶의 모습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났고,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회적 기억력이 획기적으로 선명해진 시대에 과거의 공소시효 제도는 약화 내지 수정이 불가피하다. DNA 감정이나 포렌식 등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증거물의 장기 보존이 가능해졌다. 세월이 흐른다고 사회와 피해자의 범죄자에 대한 원망과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반인도적 범죄나 특정 강력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어 입법에 반영되고 있다. 국제조약에 따라 반인도적 전쟁·학살범죄는 공소시효가 배제되었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대부분 중대범죄에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독일은 중한 살인의 공소시효가 30년이고 유희적 살인 등 특정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인정되지 않는다. 일본은 2010년 전반적으로 공소시효를 늘리고 살인죄 등 법정형에 사형이 포함된 12개 중범죄는 공소시효를 없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소시효 제도에 대한 손질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995년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한 이후, 2007년에는 모든 범죄의 공소시효를 대폭 연장했다. 2015년 7월에는 살인죄와 아동·장애인에 대한 성폭력범죄 등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그런데도 공소시효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에 한계가 있는데 공소시효가 없어지면 중요 사건 수사에 집중하기 어렵고, 비효율의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소시효 제도를 지탱해온 사회적 기반은 상당 부분 허물어진 것이 사실이다. 과학 수사 기법의 비약적 발달로 과거사에 대한 증거의 수집·보존에 시간·장소적 한계가 사라졌다. 상당히 오래된 범죄도 증거 확보가 충분히 가능하고, 증거 및 수사기록의 보존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공소시효 제도가 범죄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하면서 법질서와 정의를 훼손하고 나아가 범죄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관건은 실체적 정의와 인권 보장, 이상과 현실의 조화다.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타당하듯이 지나치게 과거에 매달리면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오래된 사건은 신의 심판에 맡기고, 시간에 맡겨 흘려보내자는 공소시효의 취지와, 우리의 삶에서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는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논리는 함께 타당하다. 결론은 공동체의 선택이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과거사 규명#공소시효#김학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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