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석호]‘1987년’은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고 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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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통령이 새 시대 열겠다고 다짐, 국민의 눈에는 실패의 반복처럼 보여
어긋난 시대정신이 실패 자초… 1987년의 시각이 미래까지 담을지 의문
변화 수용 못하는 정치는 구성원과 멀어져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문재인 정부 집권 두 번째 해를 보내면서 여러 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럽다. 1년 7개월 동안 한국사회는 얼마나 진보했을까?

우선 경제가 문제다. 경제성장의 부진이야 내부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 이해할 수 있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빈부격차와 청년실업은 감내하기 어렵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평가를 당장 내릴 수 없다지만 자영업자의 곡소리를 들어야 하는 국민의 마음은 무겁다. 인구정책의 기조를 보육과 양육 중심으로 전환해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세우겠다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선언은 ‘미래에는 일자리가 줄어드니 인구 감소는 큰 문제가 아니다’라는 요설(妖說)로 변했다. 그 사이 지방은 소멸의 길로 가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 SK 트레이 힐만 감독이 선수를 사랑으로 이끌며 우승을 차지하고 모기업은 인간 중심의 경영을 외치지만, SK케미칼이 만든 제품을 사용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여전히 좌절과 분노 속에서 살고 있다. ‘박용진 3법’의 운명도 오리무중이다.

새 정부의 등장에 환호하던 국민도 이제 남북관계 외의 경제, 노동, 교육, 부동산, 여성, 청년, 소수자 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매우 야박해졌다. 국정 운영 지지율은 매주 최저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청와대 고위 간부들은 하급자의 폭로에 맞서 낯 뜨거운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과연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역대 모든 대통령이 평등, 공정, 정의를 외치면서 새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해 왔지만, 국민의 눈에는 다른 정권의 비슷비슷한 패턴을 따르는 실패의 반복처럼 보인다. 국민은 ‘기다려 달라’는 정부의 호소를 또 다른 실패에 놀라지 않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고 싶다는 악어의 눈물로 이해한다. 변한 게 없다. 왜일까?

세대적 부정합이 가장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도 그랬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엽기적 행각에 초점을 둬서 그렇지 사실 이 정권의 실패는 두 사람의 무개념보다 국정을 책임질 만한 시대정신과 역량, 그리고 감각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과도한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명대사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라는 생각을 유전자에 새긴 과거의 사람들이 2016년에도 대한민국 미래의 틀을 잡고 스케치하고 채색하고 있는 동안, 막강한 자본과 인공지능 기술에 의해 다른 세상이 창조되고 있었다.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정 운영이 이념몰이와 정치게임, 신선놀음을 오가는 사이 우리는 미래와 더욱 멀어졌다.

현 정권은 어떤가.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1987년 민주화항쟁과 통일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권과 사회경제적 평등을 강조한 대통령 개헌안이나 경제 및 노동 정책,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보이는 행보로 짐작해 보았을 때, 이들은 1987년 6월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권력의 정당성과 정의로움을 갈망했던 이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않은 독재에 항거했고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싸웠다. 하나 된 조국에서 평등한 삶을 꿈꾸었다. 만약 이들이 1987년의 꿈을 2018년의 버전으로 계속 꾸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괜찮은 걸까?

국가의 폭력이 1990년의 3당 합당에 항의하는 대학생 강경대와 김귀정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 현재 국정 운영의 주체이기도 한 당시 전대협 지도부는 1991년 시민의 분노와 관계없이 시민사회의 자원을 8월 15일 범민족대회 준비로 돌렸다. 그 결정은 통일운동에는 기여했을지언정 당시 대한민국의 미래 가치였던 정의롭고 공정한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일소를 위한 싸움에는 찬물을 끼얹었다. 약간 섬뜩한 기분이 든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1987년의 시대정신은 매일 이루어지는 혁신에 우리의 미래를 연결할 의지와 능력까지 담고 있는 것일까?

현 정부와 여당, 그리고 시민단체에서 386세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요한 임무를 독점해왔다. 젊은 인재들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더불어민주당에는 장하나나 김광진 같은 정치 유망주가 없으며 자유한국당에는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김용태가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한다. 미래 가치와 변화를 정치권에 주입하고 이식할 젊은 정치인이 성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치는 구성원들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이 될 뿐이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문재인#1987#박용진 3법#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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