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소연]‘갑질’ 해도 되는 사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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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만한 힘의 차이만 있어도 사회 곳곳에서 ‘갑질’ 발생
인권을 가르치지 않은 교육
비윤리적 인간을 계도하지 않고 침묵이 ‘생존전략’인 사회의 문제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 겸 SF작가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 겸 SF작가
요즈음 뜻 맞는 동료들과 ‘직장갑질 119’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익명 제보가 가능한 오픈카톡과 이메일을 이용해 직장에서 당하는 갑질을 제보하면 노동변호사, 노무사, 활동가들이 상담을 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굳이 왜 이것까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법률구조공단도 있고 자치구의 법률홈닥터, 법무부의 마을변호사 제도도 있다.

그러나 시작하고 보니 ‘갑질’의 현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단 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의 문제였다. 물론 이론적으로 따지면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일들도 있다. 수백만 원의 비용을 부담해 1년 이상 소송을 할 수 있고 그래도 심신에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라면 법대로 해서 되는 일도 있기는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언론과 여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들도 있다. 대체로 안타깝게도 사람 목숨이 값으로 치러진 사건들이다.

그러면 법의 문제가 아닌 갑질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더 강한 사람에게 허용하고 있는 행위들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사람 앞에서 침묵해온 집합적 경험이 쌓인 결과다. 우리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외면함으로써 가능해진 어떤 행동 양식이다.

온갖 사연이 다 있다. 지나갈 때마다 의자를 발로 툭 치고 지나가는 상사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을 의자를 툭 찬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도 20, 30번 의자를 툭 차고 지나가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들다. 하지만 이 괴롭힘을 대체 어떻게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때리지 않았다. 의자를 넘어뜨리지도, 물건을 부수지도 않았다. 아주 엄밀하게 따지면 광의의 폭행죄로 신고할 수야 있다. 그렇지만 지나가면서 의자를 툭 쳤을 뿐인 직장 상사를 고소할 수 있을까?

사이 나쁜 팀장이 있다. 사원은 자신이 억울하게 찍혔다고 한다. 팀장이 보기에는 사원이 일을 너무 못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원은 팀장에게 만날 혼이 나다가, 하필 다쳐 입원을 했다. 그런데 견원지간인 팀장이 날마다 병문안을 와 “너는 출근 안 해서 좋겠다”, “나 보기 싫어서 다쳤니” 같은 말을 하고 간다. 욕을 한 것이 아니다. 직장상사가 귀한 시간을 내 병문안을 왔을 뿐이다. 심지어 주스며 과일도 먹으라며 사 온다. 병원을 옮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또 나타난다. 이쯤 되면 치료고 뭐고 도망치고 싶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을까? 집 근처에서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빤하다. 날마다 병문안을 해 사원을 격려하는 팀장을 처벌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너는 사람이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니?”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

그래, 이런 말을 들었다는 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른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너 배우라고 하는 거야. 그 정도도 못 하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왜 이렇게 유별나게 굴어.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반대로 묻고 싶다. 어째서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히죠? 일을 못하면 나무라고 가르치면 되지 왜 반성문을 스무 장 쓰라고 하죠?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을 왜 툭 치죠? 왜 시간과 노력까지 들여 가며 싫다는 사람에게 병문안을 가죠? 왜 근로관계에서, 굳이 인간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죠? 왜 굳이 반말과 성희롱을 하죠?

재벌가 3세의 갑질이 화제다. 엄정히 수사한다고 한다.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사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손톱만 한 힘의 차이만 있어도 갑질이 일어난다. 이것은 결코 우리 모두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말은 결국 딱히 가해자의 잘못은 아니라는 말과 너무나 쉽게 연결된다. 갑질은 인권을 가르치지 않은 교육의 문제이고, 비윤리적 인간을 계도하지 않는 제도의 문제이고, 괴롭힘을 오락으로 축소하여 소비하는 미디어의 문제이고, 침묵을 개인의 생존 전략으로 만든 사회의 문제다. 가해자의 잘못이고, 우리의 과제다.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 겸 SF작가
#직장갑질 119#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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