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세 팽조의 유언[시론/성석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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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재촉하는 ‘속도 중독’의 시대
진실은 느리게 전해지고 헛소문은 빨라
선동은 사람을 빠르게 모으지만 오래 못가
낭비한 삶 후회하지 않도록 의미 되새겨야

성석제 소설가
성석제 소설가
여름 초입에 친구가 남해안에 같이 다녀오자고 했다. 30여 년 전 갔었던 기억을 되살려 거기에 가는 데만 1박 2일은 걸릴 거라고 했더니 4시간이면 충분히 갈 거라고 장담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거리는 비슷한데 완행버스를 타고 오가던 비포장 지방도가 고속도로와 4차선으로 넓혀져 있어서였다.

덕분에 시간이 남아 20대에 머물러 있던 사찰에 들렀다. 그때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이 절 규모가 커지고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발길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깊어 보였던 그 공간이 새 건물과 수시로 벌어지는 행사, 갖가지 문자와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 보였다. 기억이 들어 있을 장소가 사라지고 없으니 마음이 헛헛했다.

작년에 ‘가성비’ 높다는 단체관광으로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허허벌판에 새로 세워진 호텔이 즐비했다. 어떤 명소를 들르자마자 사진만 찍고 나오고 특산물이나 기능성 식품을 사는 것이 흡사 무슨 ‘공정’처럼 착착 진행되었다.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이 몰아치는 여행의 속도였다. 뭔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행이 끝났을 때 “내 다시 단체관광을 가면 이름을 간다”고 일행들은 입을 모았지만 단체로 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여행지도 있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사고가 날 위험이 적다는 것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흙길을 포장도로로, 2차선으로 4차선으로 바꾸었다. 고속도로 위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는 길 주변의 풍경을 볼 수 없다. 소음방지벽 때문에 보이지도 않거니와 가까이서 움직이는 물체를 잘 보도록 진화한 우리의 눈이 고속으로 달리는 동안 길 주변의 어떤 것도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느릿느릿 걷거나 자전거, 완행버스, 기차를 타고 다니던 때 여행은 여행다웠다. 마음을 내준 장면과 시간이 버스정류장보다 많았다.

속도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 아닌 진짜 여행은 이동하는 시공간을 자기화하는 체험이다. 나 아닌 타자, 생소한 외부의 현상과 세계를 소화하는 동안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내 존재 바깥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밭고랑과도 같은 기억을 남긴다. 기억과 경험 그 자체가 삶의 일부분이 된다.

소화는 느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배설은 빠르다. 글은 천천히 완성되고 오래 남지만 말은 빠르게 휘발하고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말에 의해 금세 지워져 버린다. 감정은 빠르고 논리는 느리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은 쉽고 수습을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며 오래 걸린다. 현혹과 선동은 사람들을 빠르게 몰려오게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진실은 느리게 전해지고 헛소문은 빠르게 퍼진다. 가짜는 금방 본색이 탄로나 버려지지만 진품의 진가는 ‘에이징’에 의해 드러난다. 번잡과 소란 속에서의 시간은 고요와 성찰 속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흐른다.

빠르다. 세월이 빠르다. 매해 매달 매주 매일 매시가 점점 빠르게 흘러간다. 삶의 속도가 빠르다.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전에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며 노년을 맞는다. ‘100세 시대’라고 할 정도로 수명이 늘어났다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삶의 길이와 질은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조리던 시대의 칠십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 것은 매순간 기억할 만한 일이나 자극, 경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세, 인간사에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내게 한정된 자원, 한정된 주의력을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갖가지 교묘한 말과 그럴듯한 포장으로 접근해오는 사람들, 인간의 뇌신경을 조종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게임, 흑백논리에 빼앗기고 나면 공짜로 줘도 전혀 고맙지 않을 위태함, 피상성만 남을 것이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내 존재를 찬란하게 물들였을 희로애락의 어느 순간들, 사랑했던 사람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는 헛되이 낭비한 삶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내 삶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될 것이다. 800세를 살았다는 중국 전설 속의 인물 팽조의 유언이 “내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다면 침을 멀리 뱉지 않고 헛되이 기운을 쓰지 않았을 것을!”이었다는데.
 
성석제 소설가
#팽조#가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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