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코리아’는 누가 만드나[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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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앞에 등 돌리는 세계… 탈세계화 위기관리 새판 짜야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긴급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전염병 대응 능력을 과시하면서 그래프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등이 세계 195개국을 대상으로 전염병의 조기 추적 및 보고, 신속 대응 및 완화, 치료 및 의료진 보호 등 6가지 질병 대응 역량을 종합 평가하고 내놓은 ‘세계보건안보(GHS)’ 순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위 10위 국가를 일일이 호명했다. 미국은 1위(83.5점), 한국은 9위(70.2점)로 세계 195개국 평균(40.2점)을 크게 웃돌았다. 중국은 51위(48.2점)에 그쳤다. 실제로 한국은 코로나19 감염자가 중국 다음으로 많지만 검사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한참 순위가 처지는 국가들마저 빗장을 거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염병 대응 역량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다급한 마음에 코로나19가 확산된 한국에 빗장을 거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나라를 붙들고 일이 터진 다음에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르고 달래본들 약발이 서지 않는다.

“우리보다 못한 나라”라는 ‘정신 승리’로 위안을 삼을 일도 아니다. 미국이 코로나19 진원지인 중국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를 취했고, GHS 순위가 높은 호주(4위)가 한국에 대한 입국 제한에 나선 것을 보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더 높고 많다. 이 틈을 타고 비 올 때 우산마저 빼앗으려는 파렴치한 나라도 있을 것이다.

피터 나바로 미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얼마 전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사태 때 우방인 호주, 영국, 캐나다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거부했다”며 호주에 백신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일을 언급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조차 “이런 위기 속에서 동맹국은 없다”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마당에 “네 어려움도 내 어려움”이라는 온정주의 외교는 한가롭게 들린다.

2009년 신종플루가 멕시코에서 창궐했을 때 중국은 공항에 도착한 멕시코인들을 격리시켰다. 멕시코행 항공기 운항을 막고 멕시코인에 대한 비자 발급도 중단했다. 멕시코 정부는 차별적이고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당시 주중 멕시코대사로 일했던 호르헤 과하르도 씨는 최근 트위터에 “중국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적이 없다”며 “2009년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와 반대로 했다”고 꼬집었다. 중국이 말하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는 중국이 어려울 때만 유효한 듯하다.

영국 헨리앤드파트너스가 지난달 발표한 세계 여권파워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나라가 189개국으로 일본(191개국), 싱가포르(190개국)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았다. 세계 어디서나 통할 것 같은 마패와 같던 한국 여권이 유엔 회원국 절반 넘게 환영하지 않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 하는 사이 고립무원의 ‘갈라파고스’ 신세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경제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개방경제의 나라 한국은 자국 이익 중심의 일방주의가 횡행하는 ‘탈세계화’의 시험지를 받았다. 상호주의와 다자주의의 믿음은 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국가 간 분쟁의 심판 역할을 하던 국제기구가 힘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사후 대응도 한계가 있다. 국가적 취약점을 사전에 진단하고 위험 요소를 줄여나가는 선제적 위기관리 대응 능력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위기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탈세계화 시대 위기관리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도널드 트럼프#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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