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부 실력으론 제2의 조국 사태 못 막는다[오늘과 내일/이승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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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들어 인사 정보 수준 급락
공직후보군에 대한 평가, 관리 기능 절실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눈 오면 자기 집 앞을 잘 치우던가요?”

2017년 2월 어느 토요일 오전. 워싱턴 특파원이던 필자 집에 정장 차림의 흑인 남성이 찾아와 백악관 신분증을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옆집 아저씨가 차관보급 공직 후보자로 지명되는데 이웃을 대상으로 평판 조회 중이라고 했다.

이 남성은 눈 치우기 외에도 이런 질문을 했다. △옆집 아저씨가 주말 파티를 자주 한다는데 시끄럽지 않으냐 △파티 후 통상 술병은 얼마나 배출하느냐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싸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느냐…. 별걸 다 묻기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 남성은 “미국을 위해 중요한 질문”이라며 심각한 표정이었다. 성실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보니 옆집 아저씨는 몇 개월의 검증 후 낙마했다. 평판 조회가 이 정도였으니 본 검증 수위는 대단했겠다고 짐작만 했다.

2년 반 전 장면이 떠오른 건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검증 논란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조 장관이 대통령민정수석이었으니 검증이 엉망이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민정수석이었다면 훨씬 나았을지 역시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문제도 있겠지만 현 정권 들어 정부의 인사 검증 역량, 시스템이 어느 때보다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조국 논란이 보여주듯 도덕성 검증은 드러나지 않은 의혹이나 논란까지 얼마나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딸 입시 관련 의혹, 사모펀드 논란은 드러난 자료만으로는 금방 알 수 없다. 주요 공직 후보군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 수집과 정보 축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그런 기능을 하던 기관과 조직은 적폐 청산을 이유로 없어지거나 축소됐다. 대표적인 게 국가정보원의 국내 파트. 댓글 조작 사건 등을 계기로 국내 파트가 대폭 정리되면서 ‘인사 파일’ 작성 기능도 사라졌다. 국내 정보는 국정원 힘의 원천. 정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며 그 뿌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평가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문제가 나타났다. 국정원이 제공하던 최고급 인사 정보가 끊기면서 청와대 민정 라인 검증에 하나둘씩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 경찰 국세청 등 다른 기관에서 인사 기초 정보는 계속 들어오지만, 이 분야에 특화된 엘리트 조직의 부재를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국정원 최고위급 인사에게 이 문제를 물었더니 “금단현상이 있겠지만 어쩌겠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실 인사 검증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조국 청문회에서 확인했듯 국회의원들에게만 검증을 맡길 수도 없다. 결국 제2의 조국 사태를 막기 위해선 주요 공직 후보군에 대한 중립적이면서도 충분한 기초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별도 조직을 두든, 기존 수사기관에 기능을 추가로 부여하든 고위 공직에 나서려면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조사를 군말 없이 거쳐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 같은 것 말이다.

사찰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를 들어 반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낙하산 인사나 깜도 안 되는 인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관이 되는 장면을 하도 자주 봐서 그렇지, 원래 공직은 그 정도의 무게와 시험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청문 선진국인 미국에선 공직 후보자 검증을 표현할 때 ‘전면적 조사’라는 뜻의 ‘Scrutiny’를 자주 쓴다. 그냥 훑고 마는 게 아니라 필자 옆집 아저씨도 거쳤을 그런 과정 말이다. 미국이 트럼프의 좌충우돌에도 주요 공직자들이 있어 어느 정도 돌아간다면 그건 1차적으로 백악관 연방수사국(FBI) 국세청(IRS) 등이 총동원되는 저인망식 검증 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조국 사태#문재인 정부#인사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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