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정당’의 타성을 깨야 한다[오늘과 내일/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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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체제 6개월 야당 의제 실종… 독자적 의제 설정으로 정국 주도해야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16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0년 3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해 초부터 불거진 국가부채 논쟁의 불씨가 꺼지기는커녕 더 확산되자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 장관의 소극적 대응을 질타했다. 외환위기를 2년여 만에 수습한 성과를 앞세워 총선 정국에서 승기를 굳히려 했는데 “나랏빚이 늘었다”는 한나라당 공세에 역풍을 맞은 것이다.

국가부채 논쟁은 일회성 정치 공방에 그치지 않고, 총선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야당이 의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여당은 물론이고 정부까지 끼어들면서 판이 커져버린 것이다. 당시 여권은 총선 패인의 하나로 야당이 제기한 국가부채 논쟁에 미숙하게 대응한 점을 꼽았다. 야당이 주도하는 정치적 의제 설정의 역동성을 보여준 사례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체제가 2월 27일 출범한 지 6개월을 맞는다. 그 기간에 국가부채 논쟁처럼 국민의 뇌리에 기억될 만한 한국당의 이슈가 뭔지 모르겠다. 주요 당직자들이 매일 아침 순서를 기다려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마디씩 하고 나면 하루 일과가 다 지나간 것 같다. 이러니 제1야당이 정부 여당 정책을 비난하는 코멘트만 하는 ‘반응 정당’이라는 조롱을 받는 처지가 됐다. 대통령 탄핵의 직격탄을 맞고, 적폐청산의 후폭풍으로 지지 기반이 거의 와해된 현실을 외면한 듯한 분위기다.

반면 여권은 벌써부터 기민하게 움직이는 분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일 “가짜뉴스나 허위정보, 과장된 전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당정청을 상대로 경제위기론이나 안보불안 공세에 정면 대응하라고 주문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민정수석실이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해 국방부, 통일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언론의 오보 대응을 잘했는지 감찰 조사에 나선 것은 대통령 지시의 점검 차원일 것이다. 8개월 남은 총선에서 야권이 던질 이슈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선제 대응의 성격이 짙다. 정국에 대응하는 긴장감만 따지면 여야가 아직 안 바뀐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만하다.

황교안 체제 6개월간 한국당은 정부 여당이 짜놓은 이슈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 여권의 이 같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면 야당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황교안 체제가 초기엔 대정부 투쟁으로 지지층 결집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 지지율 정체 현상을 보이는 이유다. 결국 야당은 자신만의 의제와 이슈로 만든 ‘링’ 위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 정부 여당이 던진 의제나 이슈만 쫓아다니는 ‘반응 정당’의 한계는 뻔하다.

지금은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어 나갈 때다. 목소리 높이고 막말 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심금을 파고드는 정책이나 의제를 개발해서 집요하게 이슈화하는 것이 야당성 회복의 첫걸음이다. 그래야 야당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도 분명해야 한다. 여권이 지속적으로 ‘평화’ 키워드를 고수하듯이 한국당은 자유우파의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 설익고 내용도 없는 보수통합 구호를 선창할 때가 아니라 자강(自强)이 우선이다.

황교안 대표는 이전과 전혀 다른 강력한 투쟁을 예고했다. 장외로 나가든, 원내에서 하든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열쇠는 한국당이 과연 자신만의 의제나 이슈를 만들어 내면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느냐다. 하지만 당내에선 4·15총선 승리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이 여전히 팽배해 있는 것 같다. 적당히 버티기만 하면 문재인 정부 실정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는 한심한 생각이다. 한국당은 덩치만 크고 변화에 둔감한 과거 공룡정당의 타성부터 깨야 한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한나라당#자유한국당#황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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