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늑대’가 ‘유능한 바보’를 만났을 때[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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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포섭된 디지털세대, 극단주의 음모론에 무방비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6일(현지 시간) 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경주용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총 소리로 오인한 관광객과 시민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옷가게나 연극 공연이 한창인 극장까지 밀고 들어가 숨었다. 이 사태로 12세 소녀부터 79세 할머니까지 최소 12명이 무릎이 깨지고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3일 텍사스주 엘패소, 4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연이은 총기 난사로 31명이 숨진 참극이 벌어진 직후라 뉴요커의 불안감도 극도로 가중됐다. NYT는 “2건의 총격 사건 후 국가 전체가 불안감에 휩싸였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는 총기 사건으로 한 해 4만 명이 숨진다. 심리적 문제 등 이상 징후가 보이면 총기 사용을 막는 ‘적기(red flag)’ 규제를 연방 차원에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총기는 도구일 뿐이다. 사람들의 관계를 뺏고 뺏기는 ‘제로섬의 관계’로 보고 내 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총기를 들이대는 혐오주의의 뿌리를 들어내지 못하면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3일 엘패소 월마트에 난입해 무자비하게 총기를 난사한 21세 백인 청년은 사건 직전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공” 운운하는 반이민, 인종주의 선언문을 극우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다. 3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테러도 거론했다. 줄리엣 카이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외로운 늑대는 없다’는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백인 우월주의 증오는 집단적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이 ‘동류의식’과 ‘사명감’을 형성하고 집단화, 세계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는 “숲속의 부족회의에 참가한 부족원을 외로운 늑대라고 누구도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인들이 소수인종으로 전락하는 ‘대교체(great replacement)’의 음모론과 이 사회 질서를 신속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가속화(acceleration)’의 원리를 신봉하는 백인 우월주의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왜 이런 음모론에 빠져드는 걸까. 신시아 밀러이드리스 아메리칸대 교수는 보스턴글로브 기고문에서 “과거와 다른 점은 대교체와 백인 학살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인구학적 변화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요즘 미국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는 히스패닉이 백인보다 많다. 백인 출생자가 다수인 때 태어난 마지막 세대인 요즘 젊은 세대들이 대교체 음모론에 더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이런 인구학적 변화를 근거로 백인 우월주의의 공포와 절박감을 부추기는 극우성향 정치인들은 젊은이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혐오주의 음모론은 이런 빈틈을 파고든다. NYT는 가짜뉴스가 ‘대본’처럼 잘 짜인 공통된 패턴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건강, 성 정체성, 인종 등 민감한 소재를 찾아내고 세상이 떠들썩해질 ‘대담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거짓말을 진실의 조각으로 포장해 그럴듯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널리 전파할 ‘유능한 바보(useful idiot)’를 찾아내 음모론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한다는 것이다. 외로운 늑대가 유능한 바보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다.

과거엔 음모론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지털 시대에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진다. 디지털 공간에 국경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미국 사회를 넘어 전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혐오주의의 가짜뉴스 대본을 판별하는 능력이 없으면 누구나 ‘유능한 바보’로 포섭돼 테러 공범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가짜뉴스#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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