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그물망’ 4779개로 안 된다면[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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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정신 재해석으로 안전 법령 허점 메워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우리 공동체가 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항구적인 기본법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특별법으로 이름 붙이셨나요.”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만 2개월이 안 된 1994년 12월 중순 국회. 한 국회의원은 정부가 제안한 ‘시설물 관리 특별법’ 제정에 반대했다. 정부 측은 “타 법에도 미흡하지만 안전관리가 다소 있고, 그것을 통틀어서 하나의 법안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며 특별법 통과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제처의 법령 제정 기준에 따르면 당시 이 의원이 허점을 제대로 짚었다. 특별법은 기본법에 대한 예외적 사항을 규정하는 경우에만 사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본법이 없는 경우에는 특별법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기둥은 세우지 않고, 지붕 먼저 지은 집처럼 안전 관련 첫 주요 법안은 특별법의 이름으로 허겁지겁 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6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발생했다. 한 달 뒤 정부가 재난관리법 제정을 추진하자 국회의원이 다시 반발했다.

“재난관리법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조급성, 한건주의, 외형 위주 과시행정에 대한 반성 차원의 일부인데 이것도 빨리빨리 되고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법안을 유보해야 합니다.”

다양한 해외 사례를 연구하자는 주장은 묻히고, 이 법안도 정부안에 가깝게 국회 문턱을 넘었다. 2004년 뒤늦게 재난관리법이 재난안전기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면 개조된 것만 보더라도 완성도가 떨어진 법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시행 중인 관련 법령과 하위 법규를 검색해봤다. 법령은 213건, 행정규칙은 967건, 자치법규는 3599건 등 모두 4779건이다. 숫자로는 ‘안전 그물망’이 촘촘할 것 같지만 최근 발생한 광주 C클럽 붕괴와 서울 양천구 목동의 배수터널 사고 등 생활 속 안전사고에 무기력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안전헌법’의 원포인트 개정이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위 법령을 한꺼번에 재정비할 수 있고, 안전 예산을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모든 인간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갖는다’는 명시적인 안전권을 헌법에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유럽의 인권 선진국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유럽인권규약의 6조를 우리 헌법에도 적용할 것을 당시 개정위원들이 합의한 것이다. 정권 교체 뒤인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이 조항에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추가해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안전 헌법에 관한 국민적 합의와 여야 간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국회만 믿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등 최고 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행히 1987년 헌법은 10조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 외에 34조6항에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처음 도입했다. “헌법이란 법관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법언(法諺)이 있을 정도로 헌법 해석권은 법관의 고유 권한이다.

“안전사고가 반복되는 건 기소되더라도 미온적 처벌을 받기 때문”이라는 사고 피해자 측의 비판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가. 현행 헌법은 불완전하지만 안전권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형사재판이 아닌 행정소송에서 국가재정법 등의 성인지(性認知) 예산에 착안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판결 기준을 제시했고, 이는 하급심을,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안전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안전관리#재난관리법#헌법#안전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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