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아들의 ‘오른 검지 지문’[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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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씨 부자 은닉재산 환수해야 고통받은 국민에게 보상될 것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우린 끝까지 간다.”

지난해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은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의 보고를 받으면서 장기 해외도피 사범의 국내 송환에 속도를 내라며 이같이 지시했다. 그 직후 검찰의 이른바 ‘핀셋형 추적 명단’ 1, 2위에 한보그룹 정태수 전 회장과 그의 4남 정한근 전 부회장 부자의 이름이 올랐다. 천문학적인 세금 체납과 1997년 외환위기를 부른 한보 사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정태수 씨가 2007년, 정한근 씨가 1998년 해외로 도피했지만 추적 성과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다.

정 씨 부자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검찰은 이들의 과거 수사 기록을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정한근 씨의 친구인 R 씨의 수상한 행적이 새롭게 포착됐다. R 씨는 캐나다에 간 적이 없었지만 누군가 R 씨의 영문 이름 여권으로 캐나다에 입국한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2011년엔 R 씨와 영문 이름이 같은 남성이 대만 여성과 결혼해 미국시민권까지 취득했다.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으로부터 검찰은 시민권을 취득할 때 제출한 서류 일체를 전달받았다. 검찰은 이 서류에 찍혀 있는 정체불명의 오른손 검지의 지문을 정한근 씨가 한국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 날인한 10개의 손가락 지문과 대조했다. 지난해 11월경 대검의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는 두 지문이 100%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해외도피 기간 후견인 역할을 한 아들의 지문 탓에 정태수 씨의 흔적이 들통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 국제 공조로 정한근 씨가 R 씨로 신분을 세탁한 뒤 2010년 7월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이 추가로 파악됐다. 검찰은 이때부터 한국과 범죄인인도청구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에콰도르 정부를 상대로 정 씨 부자를 국내로 송환하기 위한 전방위 외교전을 벌였다.

올 4월 대검 국제협력단장이 현지에서 ‘1차 작전’을 시도했다. 정 씨 부자의 은신처인 과야킬에서 대기했지만 에콰도르에서 구금 영장을 발부하지 않아 실패했다. 올 6월 문 총장이 직접 에콰도르에서 정 씨 부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2차 작전’이 짜였다. 하지만 국회에서 검찰개혁 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면서 문 총장은 해외 출장 중 정 씨 부자가 한때 거주했던 키르기스스탄까지만 방문한 뒤 에콰도르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지난달 하순 에콰도르 정부가 정한근 씨의 에콰도르 출국 사실을 우리 측에 미리 통보했고, 검찰은 국제 공조 수사 끝에 그를 경유지인 파나마 공항에서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검찰이 정 씨 부자의 은신처에 거의 접근한 지난해 12월 정태수 씨가 만 95세로 사망한 것은 ‘옥에 티’였다. 성공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기대하는 금품의 10배, 100배를 안겨줘서라도 기어이 원하는 것을 성취했던 그도 오랜 지병과 나이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정태수 씨의 한보 사태 관련 판결문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한 기업인의 무모한 야망,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기업 운영, 권력가에 대한 뇌물의 제공과 반대급부로서의 특혜의 제공, 이런 것들이 모두 결합하고, 상승 작용을 한 결과는 국민의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는 대재앙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 이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관련자에 대한 강력한 응징으로 보상되어야 한다.’

유골함과 함께 발견된 정태수 씨의 150쪽짜리 자필 유고 어디에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외환위기로 큰 고통을 받은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문구가 없다고 한다. 정 씨 부자가 해외로 빼돌린 것으로 알려진 2000억 원대의 은닉 재산을 검찰이 끝까지 추적해 환수하는 것이야말로 외환위기로 상처받은 국민들을 보상하는 길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정태수 아들#정한근#한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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