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2019 뉴욕, ‘벚꽃 엔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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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축제가 품은 아픈 과거… 역사 외면하면 과오 반복돼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4월엔 미국 뉴욕에서도 벚꽃축제가 열린다. 이맘때 맨해튼 동쪽 루스벨트섬 둘레길의 벚나무 600여 그루가 서울 여의도처럼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맨해튼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이스트강 바람에 흩날리는 분홍 벚꽃 군무는 뉴욕에서만 즐길 수 있는 풍경이다. 13일(현지 시간) 시작된 루스벨트 벚꽃축제엔 뉴욕의 긴 겨울에 지친 꽃놀이 인파 3만여 명이 몰려 뉴욕의 봄을 즐겼다.

올해 루스벨트섬 벚꽃축제가 다른 건 벚꽃 하나하나가 가슴 찡한 인류애와 결코 잊어선 안 될 아픈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 시작됐다. 미국 사회는 지진과 쓰나미로 집과 가족을 잃은 일본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벚꽃축제를 시작했고, 축제는 9년째 이어지고 있다.

루스벨트섬의 독립 언론 메인스트리트와이어는 “루스벨트주민협의회(RIRA)와 루스벨트운영공사(RIOC)가 벚나무를 심고 일본인들에게 헌정했다. 모두가 합심해 약 1만 달러를 모금했다”며 첫 축제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한국인들이 그랬듯 미국 사회도 팔을 걷고 나섰다. 세 나라가 얽힌 침략과 정복의 역사는 곤경에 빠진 일본인을 향한 측은지심과 인류애 발현에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이스트강 벚꽃길을 걷다 보면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를 만난다. 1941년 1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4개의 자유’(언론과 표현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 연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연설은 세계인 모두가 누릴 기본적 4대 인권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올해 축제 기간 이 공원에 아주 특별한 작품이 전시됐다. 루스벨트 대통령 두상 조각의 시선이 향하는 난간 위에 손으로 빚어 만든 손바닥만 한 노란 그릇 120개가 등장했다. 일본계 미국인 작가인 세쓰코 윈체스터의 작품 ‘공포로부터 자유(Freedom from fear)/옐로 볼(Yellow bowl) 프로젝트’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내 구금시설 10곳에 수용됐던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이 느낀 공포를 서로 다른 모양의 노란 그릇 120개로 형상화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개의 자유’를 역설한 지 1년 만인 1942년 2월 19일 행정명령을 통해 일본계 주민 12만 명을 구금시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 3분의 2는 미국 시민, 3분의 1은 아이들이었다. 반역이나 간첩 혐의로 유죄를 받은 이도 아니었다. 단지 일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갇혔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미국은 독일계 미국인들을 따로 가두지는 않았다.

작가는 설명문에 “대부분 미국 시민이던 이들은 (공원) 바로 옆 벽면에 새겨진 ‘4개의 자유’로부터 배제됐다”고 적었다. 벚꽃축제가 끝난 뒤 작품은 공원에서 치워졌지만 지나간 과오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미국 사회의 역사 인식은 축제를 찾은 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77년 전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은 일본 군국주의 정치인들의 망상과 오판, 미국 사회 차별의 희생양이 됐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공포는 일제강점기 35년간 ‘4개의 자유’로부터 배제됐던 3000만 한국인들의 아픔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개의 자유에 대해 “새 천년의 비전이 아니다. 이 시대, 우리 세대에서 달성해야 할 세계”라고 강조했다. 4월에 뉴욕을 찾는 한미일 정치인들은 루스벨트섬에 한 번쯤 들렀으면 좋겠다. 벚꽃이 다 지기 전에.

뉴욕=박용 특파원parky@donga.com
#벚꽃축제#루스벨트 대통령#동일본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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