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박원순 시장, 고건 시장에게 ‘3수’ 배워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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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옥탑방 다음엔 휠체어 체험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일 서울청년의회에서 “하루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의 대중교통을 경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 청년 의원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자 “이런 것은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이렇게 답했다.

휠체어와 지하철을 섭외하고 기자들에게 동선을 공개하는 이벤트로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절감할 수 있을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장애인 콜택시, “리프트가 고장 났다”며 장애인을 지나치는 저상버스, “당신 하나 때문에 연착됐다”는 눈총을 주는 지하철을 체험할 수 있을까.

장애인의 나들이 체험담은 이미 차고 넘친다. 어느 1급 장애인 부부는 휠체어를 타고 유럽 여행을 다녀와 책을 냈다(‘낯선 여행, 떠날 자유’). 한강 유람선도, 남산타워도, 경복궁도 엄두를 못 냈던 부부는 파리에서 바토무슈를 타고, 에펠탑을 구경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관광했다. 장애인용 대중교통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일반 택시나 버스를 휠체어로 이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덕분이다. 서울도 이런 걸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시장이 체감하지 못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둔 것뿐이다.

‘체험 정치’에 맛들인 박 시장은 휠체어 다음엔 다시 금천구 옥탑방의 한파 체험을 예고했다. 강북구 옥탑방에 놀란 가슴, 금천구 옥탑방 보고 놀랄 일이다.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의 폭염 체험은 뜨거운 논란 끝에 지독한 화상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전임 시장들의 개발 정책을 비판해온 박 시장은 옥탑방 입주 전후로는 돌연 ‘여의도·용산 통개발’로 요약되는 싱가포르 선언과 강북 발전 로드맵을 내놓았다. 정부의 서툰 부동산 정책으로 불난 집값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서민을 위한다던 옥탑방 체험이었지만 서민들은 “우린 그냥 옥탑방에서 계속 살라는 거냐”며 가슴을 쳤다. 박 시장이 여권의 차기 대선 후보 순위 1위라는 조사 결과에 “지금이라도 빨리 사놔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시장 본인도 “박 시장의 싱가포르 발언에서 삼양동 발언까지의 40일이 문재인 정부의 400일 부동산 정책을 뒤집었다”(한겨레)며 독박 쓰는 피해를 입었다.

박 시장은 최근 방송에 나와 “시장 반응을 몰랐다는 점은 쿨하게 인정하겠다”고 했다. 통개발 선언→옥탑방 체험→또 개발 발표라는 엉뚱한 조합의 시나리오도 황당하지만 대형 개발 계획을 공표하면서 시장 반응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그건 쿨하게 인정할 게 아니라 부끄럽게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 발표 탓에 정작 중요한 노후지역과 강북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가 버렸다. 13일로 예정됐던 시정운영 4개년 계획 발표도 연기됐다. 집값 잡는다고 수요 억제에서 공급 확대로 선회한 정부와 여당이 서울의 그린벨트 해제를 압박해도 큰소리를 못 내는 처지다.

서울시장을 두 번 지낸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을 하려면 최소한 세 수를 내다봐야 한다고 했다. 정책의 부작용이 뭐가 있을까, 그게 첫 수다. 부작용에 대한 해소책은 무엇일까, 그것이 두 번째 수. 마지막으로 해소책이 효과가 있을까, 바로 세 번째 수다. 박 시장은 ‘체험 위시리스트’를 버리고 옥탑방 정치의 실패를 복기한 후 인스타그램용 ‘그림’이 안 나오더라도 최소한 세 수를 내다보는 행정에 집중해주기 바란다. 시장은 체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박원순 서울시장#부동산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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