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명건]만인의 만인에 대한 의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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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만인(萬人)이 만인을 의심하게 되는 건가. 정부 통계가 조작 시도 논란에 휩싸였다. 법원 재판은 거래 의심을 받고 있다. 국회 정치는 오래전부터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

“통계만 있으면 무엇이든, 심지어 진리까지 입증할 수 있다.” 독일 문단의 교황으로 불린 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생전에 한 말이다(‘통계의 함정’ 발터 크레머 등). 통계로 끌어낼 수 있는 믿음이 무한하다는 의미다. 뒤집으면 통계에 의심이 갈 경우 진리도 믿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정부가 그런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통계청장이 소득 분배 수준 등을 파악하는 가계 동향 조사 결과가 좋게 나오도록 통계 기준을 잡지 않아서 경질됐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통계 조작은 역사에 대한 범죄”라며 청와대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정부 경제 정책 성과나 실책을 둘러싼 통계 조작 논란은 외국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독일에선 2009년 총선에서 승리한 기민당 등의 보수 연립 정부가 실업자를 300만 명으로 발표하자 야당인 사민당은 실제 실업자가 이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직전 기민당과 사민당이 대연정을 할 당시 사민당 소속 노동장관은 정부 실업자 통계의 정확성을 강조했고, 그에 앞서 사민당이 집권할 때는 거꾸로 야당 기민당이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실업자가 18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기민당이든 사민당이든 집권당일 때는 정부 통계의 실업자 규모가 정확하다고 했고, 야당이 되면 축소됐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제국국민계몽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통계 조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비서를 지낸 브룬힐데 폼젤은 지난해 숨지기 전 언론 인터뷰에서 전사한 독일 병사 수는 줄이고 러시아군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 수는 부풀리는 등 통계를 조작했다고 털어놨다.

“나는 내가 조작한 통계만을 믿는다.”

또 괴벨스는 2차대전 적국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언급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처칠은 당시 통계부를 만들어 전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 통계가 국민 사기와 체제 안정의 관건이라고 처칠과 괴벨스 둘 다 명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이용당하고 권력에 취약한 게 통계의 숙명이다. 그래서 최근 통계청장 교체가 뜨거운 정치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통계가 정부 정책의 기준이라면 재판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법치의 기준이고 과정이자 결과다. 따라서 재판을 못 믿으면 억울한 일을 법 절차에 못 맡긴다. 자력구제(自力救濟)가 횡행하게 된다. 직접 폭행을 하거나 사람을 사서 보복을 하는 것이다. 야만의 시대가 그랬다.

그런데 법원은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중 11%만 발부했다. 일반 사건 발부율은 99%다. 법원은 자신에 대한 수사를 방해한다는 의심까지 받게 됐다. 의심에 의심이 쌓이면 깔보이게 된다. 이미 자력구제의 유혹이 번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국가의 3권, 행정 사법 입법부 모두 신뢰의 위기에 처했다. 뭘 믿고 어디로 가야 하나. 존 롤스는 저서 ‘정의론’에서 완전하게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조건으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개념을 제시했다.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을 만들 입장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실에 없는 이상적 조건이다.

하지만 행정 사법 입법부는 이 베일을 써야 한다. 통계 기준, 재판 절차, 가치와 이익 분배의 원칙을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게 싹 바꾸는 걸 실행해야 한다.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할 수 있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통계#통계청장#가계 동향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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