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은택]일정 샜다고 기업인 회동 이틀전 무산시킨 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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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택·산업부
이은택·산업부
김현철 대통령경제보좌관과 8대 그룹 최고경영자(CEO)의 20일 회동이 무산된 일을 두고 재계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원래 청와대 계획대로였으면 이들은 이날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로 모여 기업 현안이나 정부 경제정책 운용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눴어야 했다.

하지만 회동 이틀 전 언론을 통해 일정이 새나가자 청와대는 계획을 접었다. 회동 추진을 아는 한 재계 관계자는 “계획이 공개된 것을 청와대가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만남은 여전히 검토 단계로 확정이 안 됐다”고 해명했지만 아직 회동은 불투명하다.

언론을 통해 회동 무산 소식을 접한 기업들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들은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일정을 조율한 대한상공회의소도 난감한 표정이다. 대한상의는 청와대의 요청을 받고 꼬박 한 달 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8개 그룹 CEO와 일정을 조율하느라 진땀을 빼왔다.

청와대가 회동을 막판에 튼 이유는 비공개 일정인데 의도치 않게 공개됐다는 것이다. 참여 기업인 명단이 예상과 달라 취소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행여 알려지면 안 될 대화를 나눌 예정이어서 그랬던 것이라면 애초에 잘못된 만남을 기획한 것이다. 노동계를 의식해 대기업 그룹들과의 만남이 알려지는 걸 부담스러워했다면 현 정부는 언제까지 한쪽 날개로 나라 경제를 이끌려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참여 기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면 미리 알렸어야 한다.

어느 정권이든 기업인들과 소통 채널을 만들고 경제 현안에 머리를 맞대는 일은 바람직하다. 기업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나 규제 철폐를 필요로 하고, 정부는 경제성장이나 일자리 창출에 기업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국가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축인 정부와 기업인의 만남은 부끄럽거나 숨길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의혹은 ‘비공개 만남’에서 잉태됐다. 김 보좌관이 비공개를 고집하는 지금 상황은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의심받을 여지가 크다. 무슨 일이든 당당하게 공개하고 만나는 편이 낫다. 일단 일정은 공개하고, 밝히기 어려운 대화는 비공개로 하면 된다. 의사소통은 내용만큼이나 형식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들은 이런 일에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기 어려운 처지다. 회동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대한상의 역시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갑 중의 갑’인 정부가 먼저 ‘을’의 마음을 헤아리고 세심하게 신경 쓰는 자세가 아쉽다.

이은택·산업부 nabi@donga.com
#일정#기업인#회동#무산#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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