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상훈]“최순실 예산 깎아도 그만”… 약삭빠른 기재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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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국정농단 어디까지]이해 못할 예산편성 사과는커녕 비난 일자 “삭감은 국회권한” 발빼


이상훈·경제부
이상훈·경제부
 “예산 삭감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국회가 마음먹으면 100% 확정되는 것이다.”

 최순실 씨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예산이 수천억 원대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밝혔다. “시중에서 ‘최순실 사업’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답변이다.

 언뜻 봐서는 국회의 예산 심의권에 대한 당연한 설명으로 들린다. 하지만 행간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약삭빠른 정부의 조변석개(朝變夕改) 행정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합리적인 재정 배분’이란 원칙만 제대로 지켰더라도 문턱을 못 넘었을 예산들이 재정당국의 방관하에 줄줄이 통과됐는데도 책임 있는 모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 씨와 차은택 씨가 연관된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벌어진 주먹구구식 예산 편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3년 4769억 원이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콘텐츠 부문 예산은 올해 7492억 원으로 4년 새 57.1%나 늘었다. 같은 기간 정부 총예산 증가율(12.9%)의 4배가 넘는다.

 예산이 이처럼 일시에 급증하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사업들도 우후죽순 등장했다. 차 씨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문화창조 융합벨트’ 사업에 904억 원의 예산이 올해 새로 들어간 게 대표적인 사례다. 경기를 살리는 효과가 크다는 사회간접자본(SOC)조차 내년 예산이 전년 대비 8.2% 줄어드는 상황에서 특정 사업에 이 정도의 예산이 한꺼번에 편성된 건 전례를 찾기 어렵다. 당초 지난해 26억 원이 편성됐던 ‘K스타일 허브 구축’ 사업에는 관광문화진흥기금을 당겨쓰는 편법까지 동원된 끝에 지난해 171억 원이 쓰였다. 원래 실시설계만 마칠 계획이었지만 예산 지원 덕분에 리모델링 및 인테리어 공사까지 끝냈다.

 한눈에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예산 편성-집행이 이뤄졌지만 기재부는 좀처럼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문화 콘텐츠 산업을 창조경제의 주역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언급하자 효과 분석은커녕 편성을 위한 법적 절차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사업들이 예산안에 속속 끼워졌다. 일각에서는 문체부가 돈을 쓸 곳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해 기재부 등이 사업 아이디어를 제공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최순실 예산’을 둘러싼 당국의 느긋한 대응에서 평소 수억 원 단위까지 빠듯하게 예산을 짠다는 기재부의 평소 결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국회에서 수정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할 때가 아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잘못된 예산이 곳곳에 끼어든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차근차근 짚어봐야 한다.

이상훈·경제부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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