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지훈]유족은 뒷전… ‘의전’ 먼저 챙기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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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 현장방문 ‘VIP’ 모시는동안 유족은 시신 안치 병원 몰라 발동동
일부 도의원 꽃무늬 옷에 선글라스도

이지훈·사회부
이지훈·사회부
“VIP안전모로 바꿔드려. 어서!”

1일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 현장.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의 뒤에 있던 한 공무원이 이렇게 말하며 재촉했다. 곧이어 박 장관의 안전모는 검은색으로 ‘VIP’가 인쇄된 안전모로 바뀌었다. 그 덕분일까. 뒤이어 현장을 찾은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처음부터 ‘실수 없이’ VIP안전모를 착용했다. 같은 날 사고 현장을 방문한 국회의원과 경기도의원, 남양주시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뿐만 아니라 일부 경기도의원은 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친 현장에 꽃무늬 셔츠와 밀짚모자,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 현장에서 이뤄진 장관과 국회의원 등 ‘높은 분’을 위한 의전은 거의 완벽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경찰과 소방관들이 따라붙었다.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 ‘윗분’들은 매번 사고 경위를 궁금해했고 남양주소방서장은 같은 브리핑을 수차례 반복했다.

‘현장 방문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그 순간 정작 피해자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모 씨(53)의 유족은 한참 동안 시신이 안치된 병원조차 안내받지 못했다. 이들은 남양주 현대병원에서 5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이곳이 아니라 한양병원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정모 씨(61)의 유족도 마찬가지다. 당국으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정 씨의 사위는 “한양병원에 장인어른이 계시다고 해서 그리로 가서 기다렸더니 실제론 현대병원에 있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고 직후 피해자 가족들은 근로자들이 숨지고 다쳤다는 사실도 신속히 전해 듣지 못했다. 심지어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119에 물어물어 가까스로 아버지나 남편이 입원한 병원을 찾기도 했다. 부상자 하모 씨(61)의 아들은 “아내가 네이버 기사 검색을 하다가 아버지가 다친 사실을 알게 됐다”며 “어느 병원에 계신지 몰라 119에 직접 전화했다”고 말했다.

물론 관련 부처 공무원이나 정치인의 사고 현장 방문이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다. 그들의 발길이 이어지면 현장 책임자들은 긴장하고 수습에 더욱 신경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윗분들 의전이 사고 피해자와 가족을 살피는 것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가족들이 병원을 전전하는 상황에서 공무원들이 VIP의 안전모와 안전복을 챙기는 데 신경 쓰고 식사 장소를 알아보느라 전화를 돌리는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믄서.” 요즘 유행하는 영화 ‘곡성’에 나오는 대사다. 1일 사고 현장의 풍경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남양주=이지훈 사회부 easyhoon@donga.com
#기자의 눈#소방서#유족#의전#남양주 사고#지하철#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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