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동진]美의회가 보여준 ‘신속처리의 정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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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사회부
신동진·사회부
“법안 신속처리절차를 도입한 국회 스스로 제도의 본질을 오도하고 있으니 이 무슨 코미디인가.”

지난주 만난 한 헌법 권위자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다툼 중인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몰이해에 혀를 찼다. 미국 의회의 신속처리절차(패스트 트랙)를 모방해 놓고는 그 절차를 어디에 쓰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미 의회는 패스트 트랙인 ‘의사규칙정지’ 제도를 적용해 37일 만에 고강도 대북제재 법안을 통과시켰다. 평균 4개월 넘게 걸리는 상하원 표결 과정을 지난달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40일도 안돼 끝낸 것이다. 의사규칙정지는 미국 하원의장이 긴급의안에 대해 정상적인 본회의 절차를 멈추고 신속하게 심의 표결하게 하는 제도다. 규칙정지 동의에 대한 표결은 동시에 해당 법안 통과 표결이 되며, 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다.

반면 한국 국회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 규탄 결의안 외에 어떤 입법 지원도 (신속은커녕 전혀) 해줄 기미가 없다. 2012년 5월 시행된 국회선진화법에는 미국처럼 ‘신속안건처리 제도’가 있지만 단 한 번도 가동된 적이 없다. 국회의원들이 제도의 취지는 도외시한 채 숫자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신속처리안건 지정요건을 ‘재적의원의 5분의 3’으로 규정한 선진화법 조항이 헌법상 단순 과반수 원칙에 어긋난다며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원래 신속처리절차는 여야 간 논쟁이 적은 비쟁점법안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본회의 통과가 예상되는 법안처리를 위한 것이어서 지정요건이 ‘2분의 1’이든 ‘5분의 3’이든 의미가 없지만, 국회는 이 절차를 쟁점법안 처리도구로 오인하고 있다. 미국도 3분의 2로 한국보다 까다롭다.

국회는 신속처리절차의 본질을 ‘본회의 직권상정 비상구’로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이 규정을 애먼 직권상정 문제와 결부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상처리, 신속처리, (상임위를 거치지 않는) 본회의 처리 등 3단계로 구분된 선진국 의회 규정을 18대 국회까지 잘 베껴왔는데, 19대에서 갑자기 잘못 고쳤다”는 혹평이 나오는 이유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12일 앞다퉈 개성공단 입주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공언했다. 급작스러운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으로 막심한 피해를 본 기업들에 보상 문제는 촉각을 다투는 생존의 문제다. 그동안 여야가 유명무실했던 신속처리절차를 이번에 활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벌써 이틀이 지났다.

신동진·사회부 shine@donga.com
#미국#의회#신속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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