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환자의식’[횡설수설/이태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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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저녁 무렵부터 목이 아프고 가래가 좀 생김. 2월 2일, 오후부터 목 뒤 어깨에서 등 쪽으로 뻐근하고 뭔가 불편한 느낌이다. 2월 8일 오후 11시 52분, 기침이 계속 나고 가슴이 답답해 잠이 오지 않는다.”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완쾌돼 인천에서 지난주 퇴원한 1129번 확진자(53)는 자신의 투병 생활을 38쪽에 달하는 일지로 기록했다.

▷서울 경복궁 등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한 그는 1월 하순경 몸에 이상을 느끼자 그 직후부터 스스로 자가 격리를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철저한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가족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집에서도 마스크와 위생장갑을 낀 채 생활했고 식기도 소독해 사용했다. 확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인적이 드문 철길을 따라 30, 40분을 걸어서 갔다. ‘다른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음 기록을 남긴다’고 일지 머리말에 쓴 것처럼 주변에 미칠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 덕분에 그와 접촉한 23명 전원이 음성 판정을 받았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한 슈퍼 전파자는 마스크를 쓰라는 의사 처방을 어기고 병원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80명이나 감염시켰다. 당시 153명을 감염시킨 5명의 슈퍼 전파자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마스크를 쓴 사람은 1명뿐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자가 격리 수칙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 방역에 구멍을 내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지도자들의 이율배반적 행동도 시민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소 ‘결벽증 환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개인위생을 철저히 챙기기로 유명하다. 백악관 집무실에 손님이 오면 먼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오길 권하고, 악수를 한 뒤에는 곧바로 손 세정제로 소독을 한다. 집무실에서 인터뷰 도중 방송사 진행자가 기침을 하자 “나가 달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 확진자와 간접 접촉한 이후 트럼프는 진단 검사를 거부했다. 그동안 극성스럽게 자기 관리를 해온 것과는 대비되는 태도다.

▷코로나19 사태는 ‘3차 확산’이냐, 불길을 잡느냐의 중대 기로에 섰다. 1129번 환자처럼 타인에게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극심한 불편을 감내하는 성숙한 ‘환자의식’이야말로 백신도 치료약도 없다는 코로나19를 대적할 가장 큰 힘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셀프 방역을 적극 실천한다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기를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은 결국 정부도, 보건당국도 아닌 인간 자신이 아닐까.
 
이태훈 논설위원 jefflee@donga.com
#코로나19#환자의식#자가 격리 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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