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의향 투표와 결정 장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어제는 본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예정된 날이었으나 지나버렸다. 29일을 이틀 앞두고 테리사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안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의향 투표(indicative vote)가 하원에서 벌어졌다. 노딜 브렉시트, 제2차 국민투표 등 8가지 선택지 각각에 찬반 표시를 하는 투표였다. 그러나 어느 선택지도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총리의 안에 찬성하지도 않으면서 노딜 브렉시트도 제2차 국민투표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영국이 결정 장애에 빠졌다.

▷브렉시트 의향 투표는 어느 선택지에 과반의 찬성이 나오면 새로운 발의안을 만들어 정식 투표에 부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원은 총리가 EU와 합의한 안을 연거푸 거부한 데 이어 스스로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도 실패했다. 의향 투표는 과반의 찬성을 얻는 선택지가 2개 이상 나와도 골칫거리인 비정상적 투표였으나 오죽 처지가 궁색하면 그런 투표까지 했겠나 싶다.

▷다행히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의향 투표 전에 브렉시트 시한을 4월 12일로 연기하기로 결정해 노딜 브렉시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원은 다음 달 1일 다시 브렉시트 대안에 대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메이 총리는 하원의 의향 투표 직전 자신의 합의안이 통과되면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치며 반격에 나섰다. 통상은 총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임하는 것이지만 관철돼도 사임하겠다는 것이다. 열흘 남짓한 날이 새로 주어졌다. 하원이 대안 마련에 실패하면 메이 총리의 합의안을 놓고 3차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을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것은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헌법해설가 월터 배젓이 말한 대로 프랑스인에 비해 우둔할 정도로 신중한 국민성이다. 브렉시트를 결정해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신중함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좋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인류가 고안한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는 말이 있다. 신중함을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쉽다. 영국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브렉시트#국민투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