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임수]폴더블폰에 담긴 독립선언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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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두 손 높이 선언서를 치켜든 군중의 만세 함성이 거리를 뒤덮었다. 전국 곳곳에 뿌려진 독립선언서 3만5000장은 이틀 전까지 보성학교 교내에 있는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찍어낸 것이다. 종로경찰서의 악질 형사 신철이 인쇄소에 들이닥쳤지만 33인 중 한 명인 손병희가 거금 5000원을 주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일 서울 광화문광장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학생들의 손에도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손에 든 건 인쇄물이 아닌 접히는 스마트폰 ‘폴더블폰’이었다. 박유철 광복회 회장은 무대에 설치된 LG전자의 돌돌 말리는 ‘롤러블TV’ 화면을 보고 선언서를 읽었고, 미래세대를 대표한 중앙고 보성중·고 경기고 학생 6명은 삼성전자의 폴더블폰을 펴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폴더블폰을 반으로 접는 것으로 순서를 마쳤다.

▷두 제품은 아직 시중에 판매되지 않지만 주최 측 요청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LG전자가 1월 라스베이거스 ‘CES 2019’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인 롤러블TV는 최고 화제작으로 뽑혔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샌프란시스코에서 ‘갤럭시 폴드’를 공개하며 폴더블폰 시대를 선언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은 중국 스타트업 로욜이 선점했지만 완성도 면에선 비교가 안 된다. 중국 화웨이는 화면이 밖으로 접히는 ‘메이트X’로 도전장을 내밀었고, 애플도 폴더블폰을 준비하고 있다.

▷뭔가를 펴고 접는 기술은 일찍이 아시아 문화권에서 앞서갔다. 접는 우산은 고대 중국에서, 접는 부채는 6∼9세기 일본에서 발명됐다. 종이학으로 대표되는 종이접기는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최첨단 폴더블폰을 놓고 한국이 2, 3위들과 초격차 경쟁을 벌이고 있다. 목숨 걸고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던 100년 전 청년들이 첨단기기로 선언서를 읽는 후손을 본다면 감개무량할 것이다. 기미년 선열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혁신기술을 선도하는 대한민국도 가능했으니.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독립선언서#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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