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백마고지 유해 발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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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겪게 된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의 개시로 전쟁은 제한된 공세로 전환된다.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고지쟁탈전이고 그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했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하다.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백마고지가 됐다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에게 ‘화이트 호스 힐(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마고지역(驛)에 쓰여 있는 명칭의 유래 설명이다.

▷백마고지에서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사이에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싸움이 벌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공방전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6·25전쟁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27만 발의 포탄이 사용됐다. 중공군 1만3000명이 죽었고 아군은 3000명이 희생됐다. 제9사단은 이 전투의 승리로 나중에 백마부대로 불리게 됐고 그 용맹성을 인정받아 1966년 맹호부대(오늘날 수도기계화사단)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됐다.

▷남북한은 비무장지대(DMZ) 내 백마고지 격전지에서의 공동 유해 발굴에 의견을 모으고 이번 주 군 장성급 회담에서 확정할 계획이다. DMZ 내에 6·25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서의 공동 유해 발굴은 의미가 적지 않다. 백마고지역에서 북쪽으로 더 가면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이 있다. 경원선 철로는 여기서 끊겨 있다. 유해 발굴 작업이 계기가 돼 인근 지뢰를 제거하고 철마를 더 달리게 하는 작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6·25전쟁#백마고지 전투#유해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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