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없이 일-육아 둘다… 되찾은 가족과의 저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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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리스타트]<5>근로자-기업 윈윈하는 ‘전환형 시간선택제’

문진석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오른쪽)이 14일 부산 수영구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두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8월부터 시간선택제 근무로 전환한 문 연구원은 수요일을 휴무일로 정하고, 부산과 대전을 오가며 육아와 연구를 모두 해내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문진석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오른쪽)이 14일 부산 수영구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두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8월부터 시간선택제 근무로 전환한 문 연구원은 수요일을 휴무일로 정하고, 부산과 대전을 오가며 육아와 연구를 모두 해내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2008년 결혼한 문진석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34)은 7년간 ‘기러기 엄마’였다. 두 딸은 부산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남편이 맡았고, 문 연구원은 대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주말에만 부산에 머물렀다.

다행히 올해 8월부터 주 30시간만 일하는 시간제로 전환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일단 수요일은 아예 쉬는 날로 정했다. 월, 목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고 화, 금요일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한 뒤 부산으로 간다.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까지,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내내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 연구원은 “그동안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며 “경력 단절 없이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문 연구원은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다시 전일제로 전환해 연구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다.

전일제에서 주 25시간 근무로 전환한 남기원 선임연구원(왼쪽 사진)이 14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우주 발사체를 점검하고 있다. 주 20시간 근무로 전환한 한영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도 같은 날 실험을 하고 있다. 대전=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전일제에서 주 25시간 근무로 전환한 남기원 선임연구원(왼쪽 사진)이 14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우주 발사체를 점검하고 있다. 주 20시간 근무로 전환한 한영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도 같은 날 실험을 하고 있다. 대전=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전일제와 시간제의 ‘하이브리드’

정부는 올해부터 ‘전환형 시간선택제 일자리’ 지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환형 시간제란 육아, 학업 등 개인의 필요에 따라 전일제를 시간제로 전환하고, 본인이 희망하면 다시 전일제로 전환하는 ‘하이브리드형 일자리’다. 급여는 근로시간에 비례해서 지급되지만 엄연한 정규직이기 때문에 수당, 복지혜택 등은 전일제와 동일하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남기원 선임연구원(35)은 나로호 발사 성공의 주역이지만 딸(8)과 아들(5)에게는 주역이 되지 못했다. 발사체 구조를 설계하고 시험하는 업무를 맡다 보니 출장이 잦았고, 두 아이의 육아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맡았다. 나로호 발사 성공에 대한 책임감과 경력 단절 우려 때문에 휴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커갈수록 엄마의 손길이 더 필요했다. 결국 지난해 2월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했다. 휴직 기간 동안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남 연구원의 이런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준 것이 바로 전환형 시간제였다. 올해 3월 복귀를 앞두고 남 연구원은 한 주에 25시간만 일하는 시간제로 전환했다.

시간제로 전환한 뒤 가장 큰 변화는 ‘저녁’이었다. 과거에는 가족들이 모두 저녁을 따로 먹고 잠만 같이 잤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모든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시간제로 가족의 저녁을 돌려받은 것이다. 남 연구원은 “경력 단절과 육아 스트레스가 한번에 해결된 것은 물론이고 저녁의 소중함도 깨달았다”며 “급여가 다소 줄었지만 육아도우미를 쓰던 돈을 아낄 수 있어 오히려 이득”이라고 말했다.

○ 근로자와 기업 모두에 ‘윈윈’

신규로 만드는 시간제 일자리는 업무 강도가 낮은 직무가 많다. 일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라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도 크고, 정규직보다 근로조건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전환형 시간제는 기존 일자리를 활용하기 때문에 기업의 부담이 적고, 근로자 입장에서도 선택의 폭이 넓다. 사업주 입장에서도 숙련 인력을 경력단절 없이 오래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총괄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강건용 경영본부장은 “과학기술 연구자의 휴직과 이직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라며 “연구기관은 창의성이 중요한 만큼 전환형 시간제 적용 범위를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구회 산하 연구기관 25곳 가운데 21곳이 전환형 시간제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전환형 시간제가 정착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문화와 동료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육아 목적으로 올해 7월부터 하루 4시간(주 20시간) 근무로 전환한 한영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37)은 “같은 팀원이 시간제로 전환하면 다른 팀원들의 업무량이 늘어나기 마련”이라며 “동료들의 협조와 지원이 없었다면 마음 놓고 시간제로 전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연구원 역시 내년 초부터 전일제로 다시 전환해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을 예정이다. 나영돈 고용부 청년여성고용정책관은 “독일 네덜란드 등 노동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은 전환형 시간제를 통해 고용률을 높였다”며 “전환형 시간제가 널리 보급되면 일·가정 양립을 통해 저출산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부 장려금 지급 이후 시간제 전환 늘어 ▼

근로자 1인당 月12만∼20만원 지원… 대체인력 채용시 인건비도 보조


정부가 시간선택제 일자리 지원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면서 일자리의 질도 점차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시간선택제가 확실히 정착되고, 고용률도 더 상승하려면 ‘전환형 모델’이 확산돼야 한다고 보고 정책 역량을 전환형에 집중할 계획이다.

15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2년 33.8%에 불과했던 시간제 근로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이 지난해에는 58.4%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2년 사이 24.6%포인트나 증가한 것. 시간제 근로자도 고용보험에 가입하고 6개월 이상 일하다 퇴직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같은 기간 시간제 근로자의 정규직 대비 시간당 임금 비율도 67.3%에서 73.5%로 6.2%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제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올라감과 동시에 이들에 대한 사회안전망도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용부는 올해부터 전환형 시간제를 도입한 기업에 전환장려금을 지급하고 있다. 전일제에서 주 15∼25시간으로 전환한 근로자에게는 1인당 월 20만 원을 1년간 지원하고, 주 25∼30시간으로 전환한 근로자는 1년간 월 12만 원을 정액으로 지급한다.

기존에는 전일제를 시간제로 전환하고, 사업주가 추가 부담하게 된 비용이 있어야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근로자 1인당 일정금액을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제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또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장려금을 먼저 지급한 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수령토록 해 사업주가 중간에서 정부 지원금을 가로채는 일이 없도록 했다.

정부는 또 근로자를 고용할 때 발생하는 간접노무비(건강보험료, 산재보험료 등)도 전환형 시간제 근로자 1인당 월 2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다만 지원 대상을 중소, 중견기업으로 한정했다. 특히 기업이 시간제로 전환한 근로자의 대체 인력을 채용할 경우 중소, 중견기업은 대체 인력 인건비의 50%(월 60만 원 한도)까지 1년간 지원받는다. 대기업도 대체 인력 인건비의 50%까지 월 30만 원 한도로 1년간 지원받을 수 있다. 시간제 전환으로 생긴 일손 부족을 해결하고, 인건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조치다.

정부가 전환형 시간제 일자리에 대한 지원사업을 올해부터 본격 시작한 결과 지난달 말까지 총 442개 기업에서 183명의 근로자가 시간제로 전환한 것으로 집계됐다. 고용부 관계자는 “아직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기”라며 “시간제를 신규 채용한 기업들이 전환형을 함께 도입하는 경우가 많아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팀장)

▽김범석 박선희 한우신 최고야 김성모(소비자경제부) 이지은 유성열(정책사회부) 장윤정 박민우 김준일(경제부) 김창덕 이샘물 기자(산업부) 장원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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