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新명인열전]금석문 찾기 20년… “스토리텔링 통해 재미있는 향토사 만들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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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금석문 연구는 흩어져 있는 역사와 문화를 구슬처럼 꿰어내는 일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이 전북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 관찰사 이유원 선정비에 적힌 글자에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금석문 연구는 흩어져 있는 역사와 문화를 구슬처럼 꿰어내는 일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이 전북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 관찰사 이유원 선정비에 적힌 글자에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금석문(金石文)은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금석학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비문과 묘지명, 토기와 기와, 오래된 건물의 편액이나 주련에 새겨지거나 쓰인 글씨를 분석하는 것이다. 금석문을 통해 역사의 서술이 바뀐 예는 많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으로 진흥왕의 영토 확장이 사실로 굳어졌고 ‘동북아의 로제타스톤’으로 불리는 광개토왕비문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중국의 역사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전라금석문연구회 김진돈 회장(56)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전북 곳곳에 구슬처럼 흩어진 금석문을 찾아내 그 안에 담긴 얘기와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해 왔다.

○잠들어 있던 비문을 깨우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이 그렇듯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곤궁했다. 그의 고조부 김영상은 전북 정읍 칠보에서 면암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1910년 일제에 붙잡혀 군산 감옥에서 단식 끝에 절명했다. 그가 일경에 끌려가다가 만경강에 몸을 던지는 장면은 조선 말 최고의 인물화가였던 채용신이 그린 ‘투수도’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의 조부 김균은 단군 이후 우리의 역사를 기초로 ‘대동천자문’을 만든 한학자였다. 중국의 천자문이 아닌 우리만의 독자적인 천자문을 고안한 것이다. 그의 가족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순창군 쌍치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김 회장도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파리약이나 라디오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다녀야 했다. 어릴 적 집안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워 전주에서 아산 송하영과 강암 송성용에게 서예를 익혔기도 했다. 하지만 한문과 서예를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어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1990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원광대 서예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전에 이미 전북미술대전 서예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서예가였다.

그는 2001년 전라금석문연구회를 결성했다. 갈수록 개발 과정에서 사라져 가거나 마모되는 금석문을 찾아내 문화재적 가치를 발굴하고 향토사 스토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연구회는 2004년 전북 완주 봉동에서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가 앞면을 쓰고, 창암 이삼만이 뒷면을 쓴 ‘김양성 비문’을 찾아냈다. 최고의 서예가 두 사람의 글을 한 비석에서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였다. 비문은 추사의 독창적 예서와 창암의 단아한 해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는 순창 조원길 묘지에서 디딤돌로 사용되던 비석을 발굴해 글자 24자를 탁본을 통해 찾아냈다. 이 비석은 전북에서 두 번째 고려시대 비문으로 확인돼 도 지정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관찰사를 지낸 표옹 송영구의 신도비를 조사해 도 지정유형문화재로 등재시키기도 했다.

회원들의 현장답사와 연구 결과는 2003년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전라금석문연구’라는 회보로 펴냈다. 2007년부터 5년 동안은 전북도의 지원을 받아 전북 전체의 중요 금석문 500여 개를 모두 탁본하고 내용을 해설한 ‘전북금석문대계’(전 5권)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지방신문에 ‘돌, 나무, 쇠에 새긴 전북 글씨’(41회), ‘전북의 누정을 찾아서’(40회)를 장기간 연재하기도 했다.

○ 향토미시사의 보고 금석문

금석문에는 한 인물과 집안, 지역의 인맥과 혼맥, 혈연, 학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집안 간의 관계와 묘에 얽힌 얘기, 산을 둘러싼 쟁송도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1833년 전주천에 다리를 놓으면서 세워진 서천교 창건비에는 기부자들의 이름과 기부액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 다리를 짓는 데 개성과 평양, 부산 동래 사람들도 기부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 회장은 “당시에 다리를 놓는 일은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선행이자 공공기부이기 때문에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았고,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이용해 통행한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와 금석문연구회 회원들은 2010년 고창 고인돌에 새겨진 ‘통제사 이순신’이라는 글씨를 찾아내 문화재청의 스토리텔링 사업에 공모해 은상을 받기도 했다. 조사 결과 충무공 이순신이 김해 김씨 성을 가진 부하의 죽음을 애도해 글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읍 칠보 무성서원에 있다가 서울 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1831년 작 최치원 영정을 정읍시립박물관으로 되찾아 오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2008년에는 정읍 산외의 수백 년 된 돌배나무를 찾아내 찬연기념물로 지정받게 하기도 했다. 산과 들 곳곳을 누비다 보니 석장승이나 암각화, 윷판바위, 돌에 새긴 해시계 등 민속학적 자료를 많이 발굴하는 성과도 거뒀다.

전북대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2003년 완주문화원 사무국장을 거쳐 10년째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을 겸하고 있다.

“곳곳에 버려지거나 묻혀 있는 수많은 금석문이 사라지거나 더 마모되기 전에 하나라도 더 찾아내 이를 일반인이 알기 쉽게 책으로 펴내고 기초 학문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가치 있는 금석문과 선비들의 향취가 배어 있는 누정을 연결하는 답사 코스를 개발해 문화관광자원화하는 것도 그의 꿈이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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